전투사례 분석
백마고지 전투 (1952년 10월): 열흘 동안 이어진 역습과 교대
· 1952-10-06 – 1952-10-15
개요(BLUF)
1952년 10월 6일, 중공군 제38군이 철원 북서쪽 395고지(백마고지)를 공격했다. 국군 제9사단은 열흘 동안 고지를 여러 차례 빼앗기고 되찾은 끝에 10월 15일 고지와 북쪽 낙타능선 전초를 확보했다. 한국 측 정리로는 12차례 공방에 고지 주인이 7번 바뀌었다.
승패를 가른 것은 화력의 양보다 예비대 운용이었다. 사단은 첫날 밤 준비된 진지와 화력으로 버티며 예비를 아꼈다. 진지를 잃으면 적이 진지를 고치기 전에 역습했고, 지친 연대는 덜 지친 연대로 교대시켰다. 미 육군 공간사는 사단장이 공격과 방어 모두에 새 병력을 제때 투입한 것을 승인으로 꼽는다.
사진 1. 1952년 10월 1일 철원 부근 올드 발디 일대의 미 제2사단 보급소에서 한국 노무단원들이 M39 장갑 수송차량에 실린 엄체호용 통나무를 내리고 있다. 백마고지 전투 직전 이 지역 진지 공사 모습이다 — 사진: 미 육군, 퍼블릭 도메인, via Wikimedia Commons
배경과 전략적 맥락
1952년 가을 휴전회담은 포로 송환 문제로 멈춰 있었다. 전선은 고정됐고 양측은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얻으려고 감제고지를 두고 싸웠다. 395고지는 철원평야 북쪽 끝,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 서쪽 끝에 있다. 미 육군 공간사는 이 고지를 잃으면 미 제9군단이 역곡천 남쪽 고지로 물러나야 하고 철원 도로망을 쓸 수 없게 된다고 평가했다(출처 1).
10월 3일 중공군 제340연대 소속 장교 한 명이 귀순해 공격이 임박했다고 진술했다. 다른 첩보도 이를 뒷받침했다. 미 제9군단은 제9사단에 전차, 포병, 로켓 발사기, 지상 사격용 대공화기를 증강했다. 시나리오의 작전명령이 이 상황에서 출발한다.
지형과 기상
395고지는 북서–남동으로 약 3km 뻗은 능선의 정상부다. 북쪽으로 낙타능선이 이어져 적의 접근로이자 관측소 구실을 했다. 고지 남쪽으로 역곡천이 흘러 국군의 보급과 증원은 이 하천을 건너야 했다. 동남쪽 약 3km 거리, 계곡 건너편 281고지(화살머리고지)는 미 제2사단 예하 프랑스 대대가 지켰다(그림 1). 북쪽 봉래호의 거리는 자료에 따라 약 5km(한국 측)와 약 11km(미 측)로 다르다. 10월 초 기상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양측 모두 야간 공격과 야간 조명에 크게 기댔다.
그림 1. 백마고지 전투 개략도(1952.10.6–15). 위치·거리는 근사치이며 여러 날의 공방을 한 장에 겹쳐 그렸다 — 자체 제작. 시나리오 지도와 출처 1–3 바탕
양측 전력과 배치
- 국군: 제9사단(미 제9군단 예하)은 제30연대를 좌측, 제29연대를 우측에 두고 제28연대를 예비로 했다. 미 공간사에 따르면 고지에는 보병 2개 대대만 올리고 1개 연대와 1개 대대를 예비로 남겼다. 전차와 4연장 대공기관총이 측방을 맡았고, 탐조등·조명탄·조명 항공기가 밤을 밝혔다. 미 제5공군은 근접항공지원을 맡았다.
- 중공군: 제38군(제112·113·114사단)이 주공을 맡았다. 미 공간사는 제38군 9개 연대 중 7개 연대가 백마고지와 281고지에 투입됐다고 본다. 연대 단위로 차례로 들어왔고, 하루 평균 4,500발 안팎의 포·박격포 사격이 공격을 지원했다.
경과
- 첫 공격과 봉래호 방류(10월 6일): 중공군은 공격 직전 봉래호 수문을 열어 역곡천을 불렸다. 증원로를 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미 공간사는 물이 몇 피트 불었지만 전술적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고 적는다. 같은 날 281고지에 견제 공격이 들어왔으나 프랑스 대대가 막았다. 395고지 북서쪽 끝에서는 중공군 2개 대대가 세 차례 공격했고 모두 격퇴됐다.
- 잃고 되찾기(10월 7~11일): 중공군은 새 대대를 투입해 전초 중대를 고립시키고 정상을 빼앗았다. 제28연대 2개 대대가 2시간도 안 돼 역습해 회복했다. 8일에는 제334·342연대가 지친 부대와 교대해 다시 정상에 올랐고, 그날 밤 제28연대에 밀려났다. 9일 사단장은 제29연대 2개 대대를 증원했다. 같은 날 미 제5공군이 집결 중이던 제335연대를 타격해 투입을 늦췄다.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 손에 넘어갔다. 이 무렵 제28·30연대는 재편성이 필요할 만큼 소모됐다.
- 초월 공격(10월 12일): 제30연대가 막혀 있던 제29연대를 초월해 공격했다. 위키백과는 제1대대가 정면, 제2대대가 우측에서 협공해 13시 20분경 정상을 되찾았다고 적는다. 이어 제28연대가 공격을 이어받았다.
- 낙타능선과 종결(10월 13~15일): 13일 첫 낙타능선 공격은 약 6시간 만에 물러났다. 재공격으로 능선 전초를 확보했고, 15일 고지 일대가 국군 손에 들어왔다. 중국 측 자료는 동쪽 삼각고지 전투가 시작되자 14일 밤 제38군에 공격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적는다.
그림 2. 날짜별 경과. 오른쪽 열은 근거 자료이고, 주황 표시는 자료 간 차이가 있는 날이다 — 자체 제작. 출처 1–3 바탕
결심 포인트 분석
결심 1: 공격 방식(중공군 제38군)
중공군은 (가) 전 정면 동시 공격, (나) 한 고지에 연대를 차례로 투입하는 축차 공격, (다) 견제와 차단을 곁들인 집중 공격을 택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나)와 (다)를 섞었다. 봉래호 방류로 증원로를 끊고, 281고지 견제로 인접 사단을 묶은 뒤, 연대를 계속 바꿔 넣었다. 국군의 예비를 고갈시키려는 계산으로 보인다. 그러나 방류는 장애가 되지 못했고, 축차 투입은 매번 국군의 역습에 정상을 되돌려 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심 2: 첫날 밤의 예비(국군 사단·대대)
시나리오 첫 국면에 해당한다. (가) 진지 고수와 사전 계획 화력, (나) 예비 즉시 투입, (다) 능선 전초 철수, (라) 후방 하천부터 확인하는 방책이 있었다. 사단은 (가)를 택했다. 귀순자 경고로 시기를 예상했고, 조명과 전차·대공화기 사격으로 접근로를 감제할 준비가 돼 있었다. 세 차례 공격을 격퇴했고 예비는 고스란히 남았다.
결심 3: 역습의 시점(국군 연대)
정상을 잃은 밤에는 (가) 즉시 역습, (나) 날이 밝은 뒤 포병 준비사격 후 역습, (다) 화력으로만 봉쇄하는 방법이 있었다. 사단은 거의 매번 (가)를 택했다. 적이 진지를 고치고 기관총을 걸기 전이 가장 약하다고 본 것으로 보인다. 정상은 여러 번 되찾았지만, 같은 고지를 두고 손실이 쌓였다. 시나리오의 2·3국면이 이 결심을 다룬다.
결심 4: 막힌 공격을 어떻게 이을까(국군 사단)
12일 아침 제29연대의 공격은 정상 앞에서 막혔다. (가) 같은 연대로 계속 공격, (나) 화력 위주로 전환, (다) 덜 지친 연대의 초월 공격이 가능했다. 사단은 (다)를 택하고 우측 협공을 더했다. 정상 회복 뒤에는 낙타능선까지 공격했다. 첫 공격은 물러났지만 재공격으로 적의 관측소와 증원로를 빼앗았다. 시나리오 4~6국면에 해당한다.
교훈
- 예비대와 역습: 예비는 진지를 잃은 뒤에 가장 값지다. 첫날 밤 예비를 아낀 것이 이후 열흘 동안의 역습을 가능하게 했다.
- 부대 교대와 초월: 막힌 부대에 병력을 더 쌓기보다 덜 지친 부대로 교대하고 공격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고지전에서는 전투력 보존과 템포가 함께 움직인다.
- 제병협동과 야간 조명: 탐조등과 조명 항공기, 전차·대공화기 직사, 대량 포병 사격, 근접항공지원이 묶여 야간 축차 공격의 수적 우세를 상쇄했다.
- 결정적 지형: 정상만 지켜서는 고지가 안정되지 않는다. 적의 관측과 증원로가 되는 낙타능선을 빼앗고 나서야 공격이 멎었다.
- 정보: 귀순자 한 명의 진술이 군단 차원의 증강으로 이어졌다. 경고가 실제 준비로 바뀐 사례다.
미확인 쟁점
- 정상 첫 상실 날짜: 미 공간사는 10월 7일, 위키백과는 9~10일로 적는다. 봉래호 방류도 6일(한국 측·미 공간사)과 9일(위키백과)로 갈린다.
- 고지 주인이 바뀐 횟수: 7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와 24회(당시 언론 보도 인용)가 함께 돌아다닌다.
- 낙타능선 확보 시점: 14일 10시 40분(위키백과)과 15일 이후(백과사전)로 다르다.
- 포병 사격량: 미 공간사는 미 제9군단 포병 약 8만 5천 발, 위키백과는 국군 측 18만 5천 발 이상으로 적는다. 집계 범위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 손실: 국군 약 3,500명(한국 공식 집계), 중공군 약 1만 명(미·한국 측 추정)이 알려져 있다. 중국 측 자료는 더 적게 집계한다. 서로 기준이 달라 비교하지 않았다.
- 한국 측 공간사 『백마고지 전투』(1984)와 『휴전회담 고착과 고지쟁탈전의 격화』(2012) 원문은 온라인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시나리오 "백마고지 전투"에서 제9사단 대대장이 되어 이 열흘의 결심을 직접 내려 보자.
출처
- 미 육군 군사사센터(CMH),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1966) 13장 "Stalemate" 중 "The Battle for White Horse". 원문 PDF https://history.army.mil/html/books/020/20-3/CMH_Pub_20-3.pdf (403으로 열람 불가), 본문 전재본 https://www.koreanwaronline.com/history/TruceTent/ch13.htm (접속 2026-10-13)
-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마고지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군사편찬연구소 2012,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4 등 참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107 (접속 2026-10-13)
- Wikipedia, "Battle of White Horse Hill"(교차확인용, 한국 측 공간사 영역본과 중국 군사과학원 2000 인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hite_Horse_Hill (접속 2026-10-13)
- Korean War Online, "White Horse Hill"(281고지 견제 공격 관련). https://www.koreanwaronline.com/arms/WhiteHorseHill.htm (접속 2026-10-13)
- Wikimedia Commons, M39 장갑 수송차량 사진 파일 페이지(1952년 10월 1일,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39-AUV-Korea-19521001.jpg (접속 202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