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사례 분석
지평리 전투 (1951년 2월): 포위된 연대가 좁은 원으로 버틴 사흘
· 1951-02-13 – 1951-02-15
개요(BLUF)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미 제2사단 제23연대전투단은 배속된 프랑스 대대와 함께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교차로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채 진지를 지켰다. 연대는 주변 고지 대신 안쪽 낮은 땅에 직경 약 1.6km의 원형 진지를 짰고, 두 차례 야간 공격을 받았다. 15일 새벽 남쪽 G중대 고지를 잃었지만 예비를 항공·포병·전차와 묶어 오후에 되찾았다. 같은 날 저녁 남쪽에서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의 전차가 들어왔고, 중공군은 그날 밤 북쪽으로 물러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전투를 미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첫 전술적 성공으로 평가한다(출처 3). 병력에 맞는 크기의 진지, 상급 지휘관의 고수 결심과 구원 약속, 끝까지 아낀 예비가 맞물린 방어였다.
사진 1. 미 육군 군사사연구소(CMH)의 지평리 전투 지도. 원형 진지와 주변 지형을 보여 준다 — 사진: US Center for Military History, 퍼블릭 도메인(PD-USGov-Military-Army), via Wikimedia Commons
배경과 전략적 맥락
1월 말 유엔군은 중공군 개입 이후의 후퇴를 멈추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제23연대는 그 무렵 쌍굴(Twin Tunnels) 전투를 치른 뒤 2월 3일 지평리에 들어갔다. 지평리는 남북·동서 도로와 철도가 만나는 교차점으로, 중공군이 장악하면 유엔군 전선을 둘로 나누고 서부 전선 후방을 위협할 수 있었다(출처 3).
2월 11일 밤 중공군이 횡성 방면에서 미 제10군단을 치자 전선은 원주 부근까지 밀렸고, 지평리는 북쪽으로 튀어나온 돌출부가 됐다(출처 3). 13일 연대장은 약 24km 남쪽 여주로 물러나기를 건의했고 군단장도 이를 올렸다. 제8군사령관은 철수를 거부하고 지평리를 전선의 축으로 고수하게 했으며, 포위되면 북쪽으로 구원 공격을 하도록 지시했다(출처 1, 5).
지형과 기상
지평리는 분지 안에 있다. 평균 높이 약 850피트(약 260m)인 고지 8개가 마을을 둘러싼다. 이 고지를 모두 잡으려면 둘레 약 12마일(약 19km)의 능선에 직경 56km짜리 진지가 필요했다(출처 1). 연대에는 그만한 병력이 없었다. 마을 남쪽 약 1마일 지점에는 길이 약 150야드, 양쪽 벽 높이 3050피트의 도로 절개지가 있었다(출처 2). 논은 눈에 덮였고 곳곳에 얼어붙은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추위로 화기가 걸리는 일도 있었다(출처 1).
그림 1. 지평리 전투 개략도(1951.2.13–15). 위치·축척은 근사치다 — 자체 제작. 출처 1–3과 CMH 지도 바탕
양측 전력과 배치
- 미 제23연대전투단: 제23보병연대 3개 대대, 프랑스 대대, 제1레인저중대, 제37야전포병대대, 제503야전포병대대 B포대(155mm), 제82자동화기대공대대 B포대(M16 6대, M19 4대), 공병중대와 연대 전차. 교차확인 자료가 인용한 미 측 수치는 약 4,500명, 이 가운데 일선 보병 약 2,500명이다(출처 5).
- 배치: 1대대 북쪽, 2대대 남쪽, 3대대 동쪽, 프랑스 대대 서쪽. B중대와 레인저중대는 연대 예비로 남겼다. 밤에는 공병이 안쪽 2선을 맡고, 전차를 바깥 선 가까이 두었으며, 틈은 지뢰와 기관총으로 막았다(출처 1).
- 중공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제39·40·42군 소속 8개 연대가 지평리를 공격했다고 쓴다(출처 3). 반면 중국 측 사단장 회고는 실제 공격에 들어간 것이 3개 연대, 약 3,000명뿐이라고 주장한다(출처 5).
사진 2. 1951년 3월 12일 다른 전선에서 지상 표적을 사격하는 미 제7사단 소속 M16 대공 자주포. 지평리에서도 같은 차량 6대가 원형 진지의 지상 방어에 쓰였다 — 사진: Hunkins, Jr.(미 육군 통신대), 퍼블릭 도메인(PD-USGov-Military-Army), via Wikimedia Commons
경과
- 준비(2월 3~12일): 열흘 동안 각 중대가 기관총 진지를 파고 박격포 사격 목표를 등록하고 지뢰를 깔았다. 매일 주변 고지로 정찰을 보냈다.
- 포위(13일): 남쪽 도로로 나간 수색대가 막혀 돌아왔고, 연대는 사실상 포위됐다.
- 첫날 밤(13일 22시~14일 07시 30분): 북서·북·남동쪽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G중대는 네 차례 공격을 받았고, 04시 공격 때 연대 전차 1대가 지원에 들어갔다. 06시 30분과 07시 30분 공격도 실패했다. 연대장은 박격포 파편에 다리를 다쳤지만 지휘를 계속했다.
- 낮(14일): 탄약 투하 24회와 여러 차례 항공 공격이 이어졌다.
- 둘째 날 밤(14일 밤~15일 새벽): 자정부터 북쪽·서쪽·동쪽 중대가 차례로 공격받았다. 탄약은 바닥나고 있었고 C-47이 밤새 조명탄을 떨어뜨렸다. 02시 30분 I중대가 뚫렸다가 3대대 자체 병력으로 회복됐다. 남쪽 G중대는 전날 22시부터 밀리기 시작해 02시 30분~03시 고지를 모두 잃었다.
- 탈환과 구원(15일): F중대·레인저 소대의 새벽 역습은 06시 15분께 막혔다. 낮에는 B중대와 레인저중대가 항공·포병·전차 지원 아래 역습했고, 개활지에서 묶였다가 네이팜 공격 뒤 16시 30분께 고지를 되찾았다.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는 15시 45분 출발해 17시께 원 안으로 들어왔다. 중공군은 그날 밤 북쪽으로 물러났다.
그림 2. 지평리 전투 시간표. 번호는 아래 목록의 사건이다 — 자체 제작. 출처 1, 2 바탕
결심 포인트 분석
그림 3. 결심 포인트별 방책과 선택. 주황 테두리가 실제로 택한 방책이다. 결심 3은 중공군 측 기록을 확인하지 못해 실제 행동으로 추정했다 — 자체 제작. 출처 1–3 바탕
결심 1: 진지 선정(연대장, 2월 3일 이후) — 시나리오 1국면
(가) 바깥 고지 모두 점령, (나) 안쪽 낮은 땅의 좁은 원형 진지와 중앙 예비, (다) 좁은 원에 바깥 고지 전초 추가, (라) 가볍게 지키고 철수 준비 가운데 (나)를 택했다. 4개 대대로 19km 능선을 지키면 진지가 얇아지고 예비가 사라진다. 좁은 원 안에서는 포병, 전차, 대공 자주포가 모든 정면을 지원할 수 있었다. 대신 고지 감제권을 내줬고, 남쪽 G중대 고지가 가장 약한 곳이 됐다.
결심 2: 고수 명령(제8군사령관, 2월 13일)
(가) 여주 철수 승인, (나) 고수 명령과 구원 공격 준비, (다) 고수하되 공중 보급에만 의존 가운데 (나)를 택했다. 돌출부를 내주면 인접 부대 측방이 열리고, 진지를 갖춘 연대라면 중공군을 붙잡아 둘 수 있다고 본 것으로 보인다. 연대는 여기에 맞춰 공중 보급과 항공 지원을 요청하고 예비를 그대로 두었다(시나리오 2국면).
결심 3: 공격 방식(중공군 지휘부, 2월 13~15일)
중공군 측 기록은 확인하지 못해 실제 행동으로 추정한다. (가) 포위만 하고 고사, (나) 야간 다방향 공격, (다) 지평리를 두고 남진이 가능했다. 중공군은 (나)를 택해 두 밤 동안 여러 방향을 쳤다. 그러나 공격은 정면마다 시차를 두고 들어왔고, 중국 측 회고는 투입 예정 연대 일부가 길을 잃었다고 주장한다(출처 5). 연대는 그 틈에 탄약과 예비를 위협이 큰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결심 4: G중대 고지 탈환(연대장, 2월 15일 새벽) — 시나리오 6·7국면
새벽 역습이 실패했고 중공군은 이전과 달리 날이 밝아도 물러나지 않았다. (가) 가용 병력으로 즉시 재역습, (나) 예비를 항공·포병·전차와 묶어 역습, (다) 안쪽 2선으로 원을 좁힘, (라) 구원 부대를 기다림 가운데 (나)를 택했다. 항공 지원을 쓸 수 있는 낮까지 예비를 아꼈다가 한 번에 썼다. 고지는 16시 30분께 되찾았다. 같은 시각 연대 전차 4대가 원 남쪽으로 나가 적의 측후방을 흔들었고, 구원 종대가 그 길로 들어왔다.
교훈
- 사주 방어와 진지 크기: 진지는 지형만이 아니라 가진 병력에 맞춰야 한다. 좁은 원은 감제권을 포기한 대신 화력 집중과 예비를 얻었다(FM 3-90, 출처 7).
- 예비 운용: 두 밤 내내 연대 예비를 아끼고 대대 자체 병력으로 돌파를 막게 했다. 예비는 결정적 장소가 드러난 뒤에 썼다.
- 제병협동과 항공: 대공 자주포의 지상 사격, 야간 조명, 근접항공지원, 공중 보급이 연대를 지탱했다.
- 임무형 지휘와 상급 의도: 고수 명령에 구원 약속이 함께 왔기에 연대는 버틸 근거가 있었다. 연대장이 부상한 뒤에도 지휘는 끊기지 않았다(ADP 6-0, 출처 6).
- 구원 작전의 비용: 구원 부대는 전차에 보병을 태워 적 지역을 통과했다. 올라탄 160명 가운데 지평리까지 함께 들어간 인원은 23명이었다(출처 2). 속도를 택한 대가였다.
미확인 쟁점
- 중공군 규모: 8개 연대(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실제 공격 3개 연대(중국 측 회고) 사이 차이가 크다.
- 손실: 미 측 추정(중공군 전사 약 2,000명·부상 약 3,000명)과 중국 측 회고(900여 명)가 크게 다르다. 유엔군 손실(전사 51명·부상 250명·실종 42명)도 1990년 답사 자료를 재인용한 수치로, 원자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 날짜와 시각: 기간은 13
14일, 1315일, 1319일로 자료마다 다르고, 구원 부대 도착은 17시17시 25분으로 엇갈린다.
이 전투는 훈련 시나리오 '지평리 전투'에서 제23연대전투단장이 되어 직접 지휘해 볼 수 있다. 어디에 선을 긋고 예비를 언제 쓸지 같은 조건에서 결심해 보자.
출처
- 미 육군 군사사연구소(CMH), Combat Actions in Korea 8장 "Chipyong-ni"(공개 전사본). https://www.koreanwaronline.com/history/CombatActions/Chipyong-ni.htm (접속 2026-10-13)
- 미 육군 군사사연구소(CMH), Combat Actions in Korea 9장 "Task Force Crombez"(공개 전사본). https://www.koreanwaronline.com/history/CombatActions/TFCrombez.htm (접속 2026-10-13)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평리전투'(2013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개정).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443 (접속 2026-10-13)
- 미 육군 군사사연구소(CMH),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15장(접속 403, 미열람). https://history.army.mil/html/books/020/20-3/CMH_Pub_20-3.pdf (접속 시도 2026-10-13)
- Wikipedia, "Battle of Chipyong-ni"(교차확인용, 병력·손실·중국 측 회고 재인용).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hipyong-ni (접속 2026-10-13)
- 미 육군, ADP 6-0 Mission Command. https://armypubs.army.mil/ProductMaps/PubForm/ADP.aspx (접속 2026-10-13)
- 미 육군, FM 3-90 Tactics(방어 작전). https://armypubs.army.mil/ProductMaps/PubForm/FM.aspx (접속 2026-10-13)
- Wikimedia Commons, CMH 지평리 전투 지도 파일 페이지(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p_Chipyong-ni.jpg (접속 2026-10-13)
- Wikimedia Commons, M16 대공 자주포 사진 파일 페이지(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16-halftrack-korea.jpg (접속 202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