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사례 분석
춘천-홍천 전투 (1950년 6월): 강과 포병으로 번 사흘
· 1950-06-25 – 1950-06-30
개요(BLUF)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 제2군단이 화천과 인제에서 춘천·홍천 방면으로 공격했다. 국군 제6사단은 개전 초 전선 곳곳이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춘천을 사흘 가까이 지켰다. 제7연대는 경계진지를 잃자 곧바로 소양강 주저항선으로 물러나 제16포병대대의 화집점 사격과 함께 싸웠다. 북한군 제2사단은 첫날 예비 연대까지 넣고도 강을 건너지 못했고, 제2군단은 홍천으로 가던 제7사단을 춘천으로 돌렸다. 춘천은 6월 27~28일(사료마다 다르다), 홍천은 30일 함락됐다.
대전차 수단이 약한 부대도 장애물과 계획 화력이 있는 곳을 골라 싸우고, 공세 행동에 한계선을 두고, 철수 시기와 엄호 부대를 미리 정하면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사례다.
배경과 전략적 맥락
북한군 남침 계획에서 주공은 의정부 축선이었고, 중동부의 제2군단은 조공이었다. 이성춘(2015)에 따르면 제2군단은 인제–홍천과 화천–춘천–가평 두 축으로 내려간 뒤 서쪽으로 돌아 한강을 건너고, 수원 이남을 점령해 서울 일대 국군의 퇴로를 끊을 계획이었다. 춘천에서 하루가 늦으면 포위 기동 전체가 그만큼 늦어지는 구조였다.
국군 제6사단은 가평 서북방에서 현리까지 약 84km 정면을 맡았다. 제7연대가 춘천, 제2연대가 홍천에 있었고 제19연대는 원주에서 사단 예비였다. 미 육군 공간사(Appleman)는 이 사단이 외출·외박을 내보내지 않아 진지에 정원이 배치돼 있었다고 적었다.
지형과 기상
춘천은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분지다. 화천에서 오는 도로는 북한강의 모진교를 건너 옥산포를 지나 소양교로 시내에 들어온다(그림 1). 소양강 북쪽 옥산포는 평탄한 들판이라 공격 측이 몸을 숨기기 어려웠고, 우두산과 봉의산은 관측에 유리했다. 기계화 부대는 모진교를 거쳐야 했지만 국군은 이 다리를 폭파하지 못했다. 남쪽으로는 5번 도로가 원창고개를 넘어 홍천으로, 서쪽으로는 46번 도로가 가평으로 이어진다. 25일 새벽에는 안개와 가랑비로 관측이 제한됐다.
그림 1. 춘천-홍천 전투 개략도(1950.6.25–30). 위치·경로는 근사치이고 지형은 단순화했다 — 자체 제작. 출처 1–3, 5 바탕, 시나리오 지도 참고
양측 전력과 배치
- 국군: 제6사단 병력은 1950년 6월 15일 기준 9,112명, 그중 제7연대가 2,411명이었다. 사단 포병은 105mm M3 곡사포 15문의 제16포병대대였다(유효 사거리 약 7,250야드). 57mm급 대전차 화기로는 자주포 정면 장갑을 뚫기 어려웠다. 연대는 1대대를 옥산포·우두산 일대에, 2대대를 소양강 남안에 두었다.
- 북한군: 제2사단(약 10,800명)이 제4·6연대를 앞세우고 제17연대를 예비로 두었다. 제7사단(약 12,000명)은 인제에서 홍천으로 향했다. 제2사단은 SU-76 자주포 16문을 보유했고, 전차는 제7사단이 오기 전까지 춘천에 나타나지 않았다(Appleman). 춘천 방면 화포·박격포는 93 대 211, 대전차포는 12 대 64였다(이성춘 2015).
사진 1. 북한군이 운용한 SU-76 자주포(왼쪽)와 미 해병대 M26 전차(1950년 12월 3일 촬영). 춘천에서 국군 57mm 화기로 정면을 막기 어려웠던 장비다 — 사진: Cpl. Wolfe(미 해병대),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경과
- 주저항선 전투(6월 25일): 04~05시 공격준비사격 뒤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이 모진교를 건너 경계진지를 밀어냈다. 제7연대는 소양강 주저항선으로 물러났고, 정오가 지나 적 선두가 옥산포로 들어왔다. 제16포병대대는 미리 등록한 화집점에 사격했다. 대전차포 소대장이 이끈 육박공격조가 자주포를 공격했고, 19시에는 대대 규모 반격이 있었다. 적은 예비 제17연대까지 넣었지만 강을 건너지 못했다.
- 제한 공격과 적의 증원(6월 26일): 밤사이 제19연대 2대대가 우두산에 도착했다. 08시께 1대대가 포병 집중사격 아래 옥산포로 공격하되 삼거리 선에서 멈췄다. 두 시간쯤 뒤 적이 다시 밀려오자 대대는 우두산으로, 밤에는 강 건너 봉의산으로 물러났다. 하류 가래묵나루로 건너려던 적은 포격에 막혔다. 이날 저녁 북한군 제7사단이 춘천에 도착했다.
- 춘천 철수(6월 27~28일): 28일 08시 세 방향 동시 공격이 시작됐고, 주공은 전차와 포병을 앞세워 5번 도로로 내려왔다. 2대대와 2포대가 세 시간 가까이 맞섰지만 897고지를 잃었다. Appleman은 28일 아침 T-34 9대가 북한군 주력을 이끌고 시내에 들어왔다고 썼다.
- 원창고개 엄호(6월 29~30일): 2대대가 포대 하나와 원창고개에 남았다. 29일 06시 적 2개 연대 규모가 올라오자 200m까지 사격을 참았다가 일제히 쏴 공격을 꺾었다. 2대대는 13시에 물러났고, 연대는 자정까지 화양강 남안 371고지·418고지·삼마치 일대를 점령했다. 홍천에서는 제2연대가 말고개 등에서 적을 늦췄고, 홍천은 30일 함락됐다.
그림 2. 춘천-홍천 전투 시간표. 주황 칸은 결심 포인트와 직결된 사건이다. 춘천 함락 시점은 사료마다 다르다 — 자체 제작. 출처 1, 3, 5–8 바탕
사진 2. 105mm M3 곡사포(미국 하와이 육군박물관 전시품, 2006년 촬영). 1950년 국군 사단 포병의 주력 화포다 — 사진: Max Smith,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결심 포인트 분석
그림 3. 결심 포인트별 방책과 선택. 주황 테두리가 실제로 택한 방책이다. 결심 3의 대안은 사료가 직접 다루지 않아 추론했다 — 자체 제작. 본문 분석과 출처 1, 3, 5 바탕
결심 1: 경계진지가 무너졌을 때(제7연대장, 25일 오전)
방책은 (가) 역습해 경계진지 회복, (나) 소양강 주저항선에서 사전 계획 화력으로 싸우기, (다) 경계진지 고수, (라) 시내로 물러나 교량 폭파였다. 연대는 (나)를 택했다. 자주포를 막을 화기가 없는데 개활지에서 역습하면 적이 원하는 싸움이 된다. 강을 장애물로, 옥산포 들판을 화집점으로 쓰려는 선택으로 보인다. 첫날 적은 도하하지 못했다.
결심 2: 방어 중 공세(제7연대장, 26일 08시)
방책은 (가) 강 선에서 방어만, (나) 삼거리 선까지 제한 공격, (다) 모진교까지 깊이 역습, (라) 증원 대대를 예비로만 운용이었다. (나)가 선택됐다. 증원 대대가 우두산을 받쳐 주고 옥산포에 화집점이 등록돼 있어, 도하를 준비하는 적을 흔들 여건이 있었다. 한계선을 정해 둔 덕분에 적이 반격해 오자 대대는 들판에 머물지 않고 돌아왔다.
결심 3: 증원 방향(북한군 제2군단, 25~26일)
방책은 (가) 제2사단 단독 공격 지속, (나) 제7사단을 춘천으로 전환, (다) 춘천을 견제하며 가평 방면 기동으로 볼 수 있다. Appleman에 따르면 첫날 실패로 제2군단은 제7사단의 계획을 바꿨다. 춘천 도로망 없이는 서쪽 우회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춘천은 28일 떨어졌지만 홍천 축 공격력이 나뉘었다. 이성춘이 인용한 소련 군사고문단장 보고서는 제2사단이 사흘간 30km밖에 나아가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결심 4: 고수냐 철수냐(제7연대장, 27~28일)
방책은 (가) 춘천 고수, (나) 전차 종대 역습, (다) 원창고개에 엄호 부대를 두고 축차 철수, (라) 홍천까지 즉시 철수였다. 연대는 사단장 승인을 받아 (다)를 택했다. 포병 탄약이 바닥나고 인접 전선이 무너졌으며, 인제에서 온 적이 후방을 끊을 수 있었다. 엄호 부대가 29일 오후까지 버틴 덕분에 연대는 전투력을 보존한 채 새 진지를 잡았다.
교훈
- 지형과 화력의 결합: 강과 그 앞 개활지에 등록한 화력이 대전차 수단의 열세를 메웠다. 싸울 곳을 고르는 것도 결심이다.
- 제병협동: 장갑을 뚫을 수 없으면 장갑과 보병을 떼어 놓는다. 포병은 보병을, 육박공격조는 고립된 차량을 맡았다.
- 방어 중 공세 행동: 목표·한계선·복귀 계획을 갖춘 제한 공격은 적의 템포를 깨면서도 방어 편성을 흔들지 않았다.
- 지연전과 사격 통제: 철수 시기와 엄호 부대를 먼저 정했고, 엄호 대대는 200m 사격 통제로 적은 탄약의 효과를 키웠다.
- 작전적 효과의 한계: 전술적 지연이 상대 군단 계획을 늦췄지만, 인접 전선이 무너지자 춘천을 더 붙들 수는 없었다.
미확인 쟁점
- 춘천 함락 시점: 27일 정오(이성춘), 27일 18시께 철수 명령(전북일보), 28일(Appleman, 위키백과, 1991년 회고)로 엇갈린다.
- 철수 결정 주체: 사단장 승인(위키백과), 상급부대 판단(1991년 회고), 육군본부 지시(전적기념관 안내 검색 요약, 원문 미확인)가 각각 제시된다.
- 손실 수치: Appleman은 포로 진술을 근거로 북한군 제2사단 손실 40% 이상, SU-76 16문 중 7문 파괴를 적었다. 포로 진술에 기댄 주장이며, 국군 손실은 확인하지 못했다.
- 육박공격조 전과: 자주포 2문(이성춘)에서 약 6문(Wilson Center 요약)까지 다르다. 2016년 이의 제기 뒤 국방부 위원회가 2017년 일부를 고쳐 공적을 확인했다고 한다.
- 공간사 『6·25전쟁사』 2권 원문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이 전투의 결심을 직접 내려 보고 싶다면 훈련 시나리오 「춘천-홍천 전투」에서 제7연대를 지휘해 보자.
출처
-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1961), 3장 "Invasion Across the Parallel". https://history.army.mil/books/korea/20-2-1/sn03.htm (원 사이트 접속 차단으로 미러 사용: https://www.koreanwaronline.com/history/Appleman/Chapter3.htm) (접속 2026-10-13)
- 같은 책 2장, 표 1(1950년 6월 15일 국군 병력)과 화포 제원. https://history.army.mil/books/korea/20-2-1/sn02.htm (미러: https://www.koreanwaronline.com/history/Appleman/Chapter2.htm) (접속 2026-10-13)
- 이성춘, 「6·25전쟁 초기 춘천지구 전투의 재분석과 평가」, 『융합보안 논문지』 15(4) (2015-06). https://www.koreascience.kr/article/JAKO201522562218864.pdf (접속 2026-10-13)
- Wilson Center, Sources and Methods 블로그, 춘천 전투와 2017년 공간사 개정 해설 (2020-05-28). https://wilsoncenter.org/blog-post/battle-chunchon (접속 2026-10-13)
- 위키백과, 「춘천 전투」(교차확인용). https://ko.wikipedia.org/wiki/%EC%B6%98%EC%B2%9C_%EC%A0%84%ED%88%AC (접속 2026-10-13)
- 서울신문, 「73년 전 그 날…나라를 구한 '춘천대첩'」 (2023-06-23). https://m.seoul.co.kr/news/2023/06/23/20230623500150 (접속 2026-10-13)
- 서울신문, 춘천 방어전 중대장 회고 (1991-06-23). https://www.seoul.co.kr/news/1991/06/23/19910623005001 (접속 2026-10-13)
- 전북일보, 춘천 전투 관련 기사 (2023-01-16). https://jjan.kr/article/20230116580210 (접속 2026-10-13)
- Wikimedia Commons, SU-76과 M26 사진 파일 페이지(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U-76-and-M26-19501203.JPG (접속 2026-10-13)
- Wikimedia Commons, 105mm M3 곡사포 사진 파일 페이지(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3_105mm_Howitzer.jpg (접속 202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