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사례 분석
현리 전투 (1951년 5월): 도로 하나에 기댄 군단
· 1951-05-16 – 1951-05-20
개요(BLUF)
1951년 5월 16일 16시께 중공군과 북한군의 '5월 공세'가 시작됐다. 중공군은 서쪽 인접 미 제10군단 예하 국군 제7사단 정면을 뚫고 산을 넘어 남동쪽으로 내려왔고, 17일 아침 현리 남서쪽 오마치 고개를 점령했다. 이 고개를 지나는 도로는 국군 제3군단(제3·9사단)의 유일한 보급로이자 철수로였다. 군단 예비 연대의 돌파 공격은 실패했고, 18일 두 사단은 남은 화포 전부와 차량 300여 대를 두고 도로 동쪽 고지대로 흩어졌다. 생존 장병은 약 60km 산길을 걸어 하진부리 부근에 모였고, 군단은 26일 해체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전투를 6·25전쟁에서 가장 큰 패전으로 기록한다. 이 글은 특정 지휘관의 책임을 따지지 않는다. 도로 하나에 기댄 부대가 퇴로의 요충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차단된 뒤에는 어떻게 싸우고 물러나야 하는지를 살핀다.
배경과 전략적 맥락
4월 공세가 멈춘 뒤 미 제8군은 무명선(No Name Line)에 진지를 강화하고 공산군의 다음 공세를 기다렸다. 동부 산악의 국군 제3군단은 미 제10군단 오른쪽에 있었다. 5월 16일 공세가 시작되자 북한군 제5군단(제6·12사단)과 제2군단이 군단 정면을 압박했고, 중공군 제27군 예하 제81사단 등은 국군 제5·7사단 사이로 들어와 제3군단 후방으로 향했다. 16일 자정께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5·7사단의 철수를 허가했는데, 이 철수가 흐트러지면서 제3군단의 서쪽 측방이 비었다.
지형과 기상
현리는 인제군 기린면 태백산맥 속 분지 마을이다(사진 1). 군단 전체가 쓰는 도로는 하나였고, 현리에서 남서쪽 상남리 방향으로 오마치 고개를 넘었다. 미 육군 공간사(Mossman)는 이 도로를 군단 지역의 '유일한 길'로, 차단 지점을 양쪽이 가파른 협곡 사이로 굽은 좁은 도로로 묘사한다. 횡방향 도로나 우회로는 없었다. 도로 동쪽은 높은 능선이 겹겹이 이어지는 산악이어서, 차량과 포병은 길을 벗어나면 움직일 수 없었다(그림 1). 당일 기상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다.
사진 1. 미 육군 지도국 1:50,000 지도 「현리(Hyon-ni)」 도엽(1945년 판). 촘촘한 등고선이 도로 하나에 기댄 산악 지형을 보여 준다 — 지도: United States Army Map Service,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양측 전력과 배치
- 국군: 제3군단은 제3·9사단과 군단 직할부대로 구성됐다. 군단 예비는 현리에 있던 제9사단의 1개 연대였다(연대 번호는 미확인). 현리에는 인접 군단의 국군 제7사단 제5연대와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도 섞여 있었다. 포병은 제3사단 제11포병대대와 제9사단 제30포병대대가 있었다.
- 공산군: 북쪽에서 북한군 2개 군단이 압박했고, 서쪽에서 중공군 제27군(제81사단 선두)이 돌파해 들어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오마치 고개를 처음 점령한 부대를 중공군 제20군 예하 대대로 적어 사료마다 다르다.
그림 1. 현리 전투 개략도(1951.5.16–20). 위치·경로는 근사치이고 지형은 단순화했다 — 자체 제작. 출처 1, 2 바탕, 미 육군 지도국 1:50,000 도엽(출처 4) 참고
경과
- 측방 붕괴(5월 16일): 16시께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공세가 시작됐다. 국군 제7사단 전방 연대가 20시께 진지를 잃었고 연락이 끊겼다. 제3군단 정면은 버텼지만, 자정께 인접 사단의 철수가 허가되면서 서쪽이 비었다.
- 오마치 고개 차단(17일 오전): 중공군 첨병 중대가 04시, 대대가 07시에 오마치 고개 일대를 점령했다. 남쪽으로 이동하던 제9사단 제30포병대대가 협곡에 들어섰다가 위에서 사격을 받았고, 후미 포대만 화포를 건졌다. 정오 무렵 국군 제7사단 예비 연대 2개 대대도 고개 부근에서 교전했다.
- 돌파 실패(17일 오후): 13시께부터 여러 사단 부대가 현리에 뒤섞여 몰려들었다. 군단 예비 연대가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공격했지만 17시 30분께 시도는 실패했다. 약 2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오마치 고개와 침교 일대를 막고 있었다. 미 제8군은 같은 날 제3군단에 와코선(무명선 남쪽 약 19~29km)까지 철수하되, 차량과 화기를 빼내도록 차단 진지를 걷어내라고 지시했다.
- 산악 이탈(18일): 제9사단이 앞장서 차단 진지를 다시 쳤고 제3사단이 후방을 맡았다. 오전 중반 북한군 제6·12사단이 현리로 다가오자 두 사단은 도로 동쪽 고지대로 흩어졌다. 군단과 사단의 무전이 끊겨 연락기가 공중에서 명령을 떨어뜨렸고, 속사리 부근에 낙오병 수집선이 생겼다. 그날 밤 군단이 다시 장악한 병력은 대대 규모를 조금 넘었다.
- 수습(19~26일): 19일 병력은 20번 도로의 수집 지점으로 흘러들었다. 이날 적과 접촉은 없었지만, 와코선에 멈춘 부대도 없었다. 미 제3사단 수색중대가 하진부리에서 제3군단 병력과 만났다. 20일 하진부리 집결 병력은 제9사단 40%, 제3사단 34.2%였다. 21일 18시 담당 지역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넘어갔고, 26일 군단이 해체됐다. 이때 육군본부의 전방 작전 지휘 범위도 줄었다(출처 3).
그림 2. 현리 전투 시간표. 주황 칸은 결심 포인트와 직결된 사건이다 — 자체 제작. 출처 1, 2 바탕
결심 포인트 분석
그림 3. 결심 포인트별 방책과 선택. 주황 테두리가 실제로 택한 방책이다. 결심 2의 대안은 추론이다 — 자체 제작. 본문 분석과 출처 1, 2 바탕
결심 1: 예비를 어디에 둘 것인가(군단 예비 연대, 16일 밤)
방책은 (가) 현리에 집결한 채 명령 대기, (나) 1개 대대를 오마치 고개 능선에 보내고 2개 대대는 예비로 유지, (다) 연대 전체로 고개 확보, (라) 수색대부터 투입이었다. 차단이 나타났을 때 예비는 현리에 있었다. 정면의 위기에 대비해 예비를 아끼려는 판단으로 보인다. 고개에 아군 경계 병력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군단이 움직이기 전에 유일한 길이 막혔다.
결심 2: 돌파 뒤 어디로 갈 것인가(중공군, 16~17일)
돌파한 중공군은 (가) 정면 전과 확대, (나) 산악을 넘어 제3군단 퇴로 차단, (다) 미 제10군단 후방 공격을 고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는 (나)였다. 경무장 부대가 밤에 능선을 타고 들어가 협곡 양쪽 고지를 먼저 쥐었다. 군단 하나를 상대로 대대 하나가 결정적 지형을 먼저 차지한 셈이다.
결심 3: 차단 진지를 어떻게 칠 것인가(예비 연대, 17일 오후)
방책은 (가) 도로를 따라 즉시 공격, (나) 양쪽 능선부터 탈취, (다) 현리 주위에 방어선을 펴고 화력을 맞춰 새벽에 공격, (라) 동쪽 우회로 수색이었다. 연대는 (가)를 택했다. 군단이 도로 개통을 서둘렀고 북쪽 압박이 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능선을 쥔 적에게 협곡 바닥 공격은 통하지 않았고, 차단 부대는 밤새 더 늘었다.
결심 4: 다시 칠 것인가, 어떻게 물러날 것인가(군단·사단, 18일 오전)
방책은 (가) 차단 진지 재공격, (나) 후위와 집결지를 정하고 중장비를 처리한 뒤 대대 단위 철수, (다) 장비를 두고 즉시 산악 이탈, (라) 현리 고수였다. 상급 부대의 철수 명령은 도로 개통을 전제로 했고, 군단은 (가)를 시도했다. 재공격이 막히고 북쪽 적이 다가오자 두 사단은 사실상 (다)로 흩어졌다. 철수로·집결지·후위를 미리 정하지 않은 상태라 통제가 무너졌다. 다행히 19일 적의 추격 접촉은 없었다.
교훈
- 결정적 지형으로서의 퇴로: 부대 전체가 도로 하나에 기대면 그 도로의 요충은 정면만큼 중요하다. 인접 부대가 흔들리는 순간 경계 병력을 보내야 한다.
- 예비 운용: 예비를 아끼는 것과 쓰지 않는 것은 다르다. 일부로 퇴로를 확보하고 나머지를 유지하는 절충을 미리 계획한다.
- 산악 차단 진지 공격: 협곡의 차단은 능선에서 풀어야 한다. 같은 방식의 공격이 막혔으면 다음 공격 전에 방식을 바꾼다.
- 철수와 지휘 통제: 철수로·집결지·후위·장비 처리 순서를 사전에 정하면 통신이 끊겨도 부대가 흩어지지 않는다. 공중 투하 명령과 낙오병 수집선은 사후 수습 수단이다.
- 인접 부대 협조: 이웃 부대의 철수 허가가 내 측방을 비운다. 군단 경계를 넘는 철수는 서로 알고 조정해야 한다.
미확인 쟁점
- 차단 부대: 미 공간사는 중공군 제27군 제81사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제20군 예하 대대를 적는다.
- 예비 연대 번호와 16일 밤 고개의 아군 경계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 손실: 북한군 제6사단 장교는 현리 일대에서 국군 약 1,2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다(미 공간사 각주). 상대 측 주장이며 검증되지 않았다. 사망자 수는 출처 근거가 약해 다루지 않는다.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8권 원문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결심을 내려 보고 싶다면 훈련 시나리오 「현리 전투」에서 군단 예비 연대를 지휘해 보자.
출처
-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1990), 25장 "Battle Below the Soyang". https://history.army.mil/books/korea/ebb/fm.htm (원 사이트 접속 차단으로 미러 사용: https://www.koreanwaronline.com/history/EbbAndFlow/Ch25.htm) (접속 2026-10-13)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리전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324 (접속 2026-10-13)
- Korea JoongAng Daily, 국군 원로 회고 연재 「60 years with the military」, 제3군단 해체 회고 (2010-12-12). https://www.koreajoongangdaily.com/lifestyle/the-front-lineus-disbands-roks-3rd-corps/10610006 (접속 2026-10-13)
- Wikimedia Commons, 미 육군 지도국 1:50,000 「Hyon Ni」 도엽 파일 페이지(Public domain, 원자료 텍사스대 PCL 지도 컬렉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p_by_the_US_Army_Map_Service_-_Hyon_Ni_-_korea_50k_-_txu-pclmaps-oclc-6612107-hyon-ni-6827-i.jpg (접속 202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