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사례 분석
심층 분석 | 현리 전투 — 유일한 퇴로를 누가 먼저 쥐었나
· 1951-05-16 – 1951-05-20
개요
1편: 현리 전투 (1951년 5월)이 도로 하나에 기댄 군단이 무너진 큰 흐름을 다뤘다면, 이 글은 그 흐름을 시각 단위로 쪼개 본다. 1951년 5월 17일 새벽 중공군 대대 하나가 현리 남서쪽 오마치 고개를 먼저 쥐었고, 국군 제3군단(제3·9사단)은 그날 오후와 이튿날 오전 두 번 도로를 다시 열려다 실패한 뒤 남은 화포 전부와 차량 300여 대를 두고 동쪽 산지로 흩어졌다[1][3]. 20일 하진부리에 모인 병력은 제9사단 40%, 제3사단 34.2%였다[3]. 아래에서는 표고·기상·월령 수치로 지형을 다시 읽고, 훈련 시나리오의 국면 p1~p8(가정 국면 x1·x3 포함)을 하나씩 따라간 뒤 미 육군 교범과 대조한다.
사진 1. 소양강 골짜기(1951년 9월). 현리 북쪽 소양강 일대의 산세를 보여 준다. 전투 넉 달 뒤의 사진이다 — 사진: 미 해병대 공식 사진(Ronald H. Welsh 컬렉션, 미 해병대 역사부 기록과),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전략·작전 맥락
4월 공세가 멈춘 뒤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중장은 4월 26일 서울 북쪽에서 동해안 양양 바로 위까지 이어지는 새 방어선을 그었다. 이름을 붙이지 않아 '무명선(No Name Line)'으로 불렸다. 28일에는 각 군단에 이 선을 굳게 지키라고 하면서, 부득이할 때 물러날 와코선(Waco Line)을 "계획 목적으로만" 내려보냈다[2]. 국가기록원은 중공군의 5차 공세를 1951년 4월 22일6월 10일로 묶고, 5월에는 동부전선 양구인제 방면에 힘을 모았다고 정리한다[7].
중공군은 5월 10~16일 5개 군을 동쪽으로 옮겼고, 16일 소양강을 건너 국군 4개 사단을 쳤다[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공세의 주공 목표가 인제 지역의 국군 제3군단이었다고 쓴다[3]. 공격 축은 군단 경계였다. 서쪽 미 제10군단 예하 국군 제5·7사단과 동쪽 국군 제3군단 사이의 이음매를 중공군 제27군이 뚫고, 북쪽에서는 북한군 제5군단(제6·12사단)이 제3군단 정면을, 북한군 제2군단(제2·27사단)이 국군 제1군단을 눌렀다[1]. 이 구도에서 제3군단의 생존은 정면 방어가 아니라 서쪽 측방과 등 뒤의 도로 하나에 달려 있었다. 미 육군 군사사센터(CMH)의 개설서는 결과를 짧게 적는다. 국군 제5·7사단은 몇 시간 만에 물러났고, 제3군단은 두 사단을 빼내지 못했다[6].
지형·기상 정밀 분석(OAKOC)
그림 1. 현리 일대 상세도(개략·추정). 마을 위치는 OSM 좌표[15], 표고는 Open-Meteo 자료[12]. 오마치 고개·하배재·통제선은 문헌 서술로 추정한 위치다 — 자체 제작. 출처 1, 2, 3 바탕
관측·사계(O). 표고 자료로 현리는 약 290m, 고개 너머 상남리는 약 563m, 두 마을 사이 고갯길 추정 지점은 약 513m다[12]. 현리에서 남서쪽으로 나가는 길은 약 270m를 오르며 고개를 넘는다. 고갯길을 내려다보는 능선을 쥔 쪽은 협곡 바닥 전체를 사계에 넣는다. 미 공간사는 포병대대가 "좁은 협곡"에 들어선 뒤 위에서 사격을 받았다고 쓴다[1]. 반대로 현리 분지에서는 고개 위의 움직임을 보기 어려웠다. 군단 동쪽의 방태산은 약 1,432m로[12], 18일 두 사단이 넘어간 산지의 높이를 짐작하게 한다.
접근로(A). 군단 지역의 차량 통로는 현리를 지나는 도로 하나였다[1]. 공간사는 이 도로를 군단 지역을 잇는 "단일 도로"로 적는다[1]. 공산군에게는 사정이 달랐다. 중공군 제27군은 버려진 국군 제7사단 지역을 지나 남동쪽으로 내려왔고, 19일에는 상남리에서 하배재를 거쳐 속사리로 이어지는 산길을 탔다[1]. 차량이 없는 보병에게 산은 장애물이 아니라 길이었다.
핵심 지형(K). 오마치 고개는 교범이 말하는 결정적 지형에 가깝다. 차지하고 지키지 않으면 임무가 성립하지 않는 땅이다[10]. 군단의 보급과 철수, 포병과 차량의 이동이 모두 이 고개를 지나야 했다. 현리와 상남리는 직선으로 약 11.6km 떨어져 있고[15], 차단 지점은 무명선 남쪽 약 6마일(약 10km)이었다[1].
장애물(O). 도로 동쪽은 1,000m를 넘는 능선이 겹친 산지였다. 이 산지는 18일 국군에게 탈출로가 되었지만 차량과 화포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현리에서 하진부리까지는 직선으로 약 41km인데[15], 실제 장병들이 걸은 산길은 약 60km였다[3].
은폐·엄폐(C). 이 일대는 숲이 깊고 골짜기가 좁아, 밤에 능선을 타는 경보병을 공중에서 찾기 어려웠다. ERA5 재분석 자료로 현리 격자의 5월 1620일 최고기온은 12.218.7℃, 최저기온은 4.510.7℃였다. 17일에는 비가 없었고 18일 3.4mm, 19일 2.7mm가 내렸다. 해는 05시 15분 무렵 뜨고 19시 30분 무렵 졌다[13]. 1,000m 고지의 밤은 이보다 추웠을 것이다. 월령도 따져 볼 만하다. 1951년 5월 상현은 한국 시각 14일 14시 32분, 보름은 21일 14시 45분이었다[14]. 1618일 밤에는 반달보다 큰 달이 저녁 하늘에 떠 있다가 자정을 넘겨 졌을 것으로 보인다(필자 계산). 산길을 걷는 쪽에게는 길을 밝혀 주는 달이었다. 17일 04시의 고개 점령도 달이 진 뒤 동트기 전의 어둠과 맞물린다. 월령 자료와 시각을 맞춘 필자의 추론이다.
사진 2. 미 육군 공간사 『Ebb and Flow』 지도 35 「Battle Below the Soyang, 16–20 May 1951」. 상남리 북쪽 차단 표시와 제81사단의 하배재–속사리 축이 보인다 — 지도: Billy C. Mossman, 미 육군 군사사센터(CMH, 1990), 퍼블릭 도메인, via Wikimedia Commons
편성과 지휘 관계
대대급까지 확인되는 쪽은 미 공간사가 적은 부대들이다. 국군 쪽 연대 번호와 중공군 차단 부대는 자료마다 다르다. 표의 "추정"과 "미확인"은 그런 부분이다.
| 측 |
제대 |
부대·요소 |
역할·상황 |
근거 |
| 유엔군 |
야전군 |
미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중장) |
17일 와코선 철수와 차단 진지 제거 명령 |
[1] |
| 미군 |
군단 |
미 제10군단(군단장 알몬드) |
16일 자정께 국군 제5·7사단 철수 허가 |
[1] |
| 국군 |
육군본부 |
강릉 전방지휘소 |
17일 아침 제3·1군단에 무명선 철수 명령 |
[1][5] |
| 국군 |
군단 |
제3군단(군단장 유재흥) |
제3·9사단, 군단 직할부대 |
[1][9] |
| 국군 |
연대 |
제9사단 예하 1개 연대(번호 미확인) |
군단 예비, 17일 현리에서 남쪽으로 돌파 시도 |
[1] |
| 국군 |
대대 |
제9사단 제30포병대대 |
17일 오전 협곡에서 매복, 후미 포대만 화포 보존 |
[1] |
| 국군 |
대대 |
제3사단 제11포병대대 |
제30대대 뒤를 따르다 저녁 현리로 복귀 |
[1] |
| 국군 |
사단 |
제9사단 / 제3사단 |
18일 각각 선두(차단 진지 공격)와 후위 |
[1] |
| 국군 |
연대 |
제7사단 제3연대(예비) 2개 대대 |
17일 정오 상남리 부근 진지 |
[1] |
| 국군 |
연대·대대 |
제7사단 제5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 |
17일 현리에 뒤섞여 집결 |
[3] |
| 중공군 |
군 |
제27군: 제81사단 선두, 제79·80사단 후속 |
차단 후 상남리–하배재–속사리로 남동진 |
[1] |
| 중공군 |
대대 |
제20군 제60사단 제178연대 제2대대 |
17일 04·07시 오마치 고개 점령(백과사전) |
[3] |
| 북한군 |
군단 |
제5군단: 제6·12사단 |
북쪽에서 현리로 추격 |
[1] |
| 북한군 |
군단 |
제2군단: 제2·27사단 |
국군 제1군단 정면, 이후 서쪽으로 이동 |
[1] |
| 미군 |
사단 |
제3보병사단(사단장 솔) |
19일 제7연대전투단, 20일 제65연대전투단 동쪽 이동, 수색중대 하진부리 |
[1] |
| 국군 |
군단 |
제1군단: 수도·제11사단 |
해안 따라 와코선으로 질서 있게 철수, 대관령 방어 |
[1][4] |
표에서 두 가지가 보인다. 첫째, 제3군단은 서쪽 측방을 이웃 군단에 맡겨 두고 있었는데, 그 이웃의 철수 허가가 자정 무렵 미 제10군단에서 나왔고 국군 육군본부는 아침에 같은 조치를 따라갔다[1]. 한 도로를 쓰는 두 지휘 계통의 철수 시각이 어긋났다. 둘째, 17일 오후 현리에는 적어도 4개 사단 소속 부대가 섞여 있었다[3]. 교범이 포위된 부대에 먼저 요구하는 단일 지휘가 여기서 필요했다[10].
시간대별 경과
5월 16일 16:00~24:00 — 공세 개시와 서쪽 측방 붕괴
16시께 강한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공세가 시작됐다. 중공군 3개 사단이 국군 제7사단 정면에 몰렸고, 20시께 제7사단 전방 연대들이 진지를 잃고 통신이 끊겼다[3]. 공간사는 같은 날 저녁 제81사단을 앞세운 중공군 제27군이 관대리 북서쪽에서 소양강을 건너 국군 제5·7사단의 경계를 쳤다고 적는다[1]. 자정 무렵 알몬드가 두 사단의 무명선 철수를 허가했다. 이른 아침의 보고는 두 사단이 그 선에서 재편성 중이라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1].
5월 17일 04:00~13:00 — 고개 차단과 포병 매복
중공군 첨병 중대가 04시에, 그 대대가 07시에 오마치 고개를 점령했다[3]. 같은 아침 국군 육군본부가 제3군단에 무명선 철수를 명령했다. 두 사단은 북한군 추격을 간신히 앞서 현리 위쪽 진지로 물러났다[1]. 남쪽으로 먼저 이동하던 제9사단 제30포병대대는 중공군이 열어 둔 협곡에 들어섰다가 양쪽에서 사격을 받았다. 후미 포대만 화포와 차량을 건졌다[1]. 정오 무렵 국군 제7사단에서 위치가 확인된 보병은 상남리 부근에 있던 예비 제3연대의 2개 대대뿐이었다[1].
5월 17일 13:00~밤 — 현리 집결과 돌파 실패
13시께 퇴로가 막혔다는 사실이 퍼지면서 여러 사단의 부대가 현리로 몰려들었고 동요가 번졌다[3]. 군단은 예비인 제9사단 예하 1개 연대를 현리에서 남쪽으로 보내 차단 진지를 치게 했다[1]. 백과사전은 돌파 시도를 17시 30분께로 적고, 2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오마치 고개와 침교 일대를 막고 있었다고 쓴다[3]. 같은 날 밴 플리트는 제3군단과 제1군단을 와코선으로 물리면서 제3군단장에게 차량과 화기를 빼낼 수 있게 차단 진지를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공간사는 군단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적는다[1]. 저녁에는 제11포병대대와 크게 상한 제30포병대대가 현리 부근에서 다시 방열했다[1].
5월 18일 — 재공격과 산악 이탈
제9사단이 앞장서 차단 진지를 치고 제3사단이 북쪽 추격을 막기로 했다[1]. 군단장은 이른 아침부터 예하 부대와 무전이 끊겼다. 오전 중반 제81사단은 상남리 쪽 차단 진지를 지켰고 북한군 제6·12사단이 현리의 제3사단에 다가왔다. 두 사단은 도로 동쪽 고지대로 흩어졌고, 남은 화포 전부와 차량 300여 대가 남았다[1]. 지형은 흩어진 병력을 남동쪽 속사리 방향으로 흘려보냈다. 연락기가 그 움직임을 따라가며 무리별로 와코선 위치를 지정하는 명령을 떨어뜨렸고, 속사리 일대에 낙오병 수집선이 섰다. 해 질 녘 군단이 다시 장악한 병력은 대대 규모를 조금 넘었다[1].
5월 19~20일 — 20번 도로와 하진부리
19일 장병들은 20번 도로의 수집 지점으로 흘러들었다. 일부는 도로 북쪽 약 5마일에 제각각 자리를 잡았지만, 그보다 7마일 북쪽의 와코선에 멈춘 부대는 없었다. 이날 적과 접촉은 없었다[1]. 밴 플리트는 미 제3사단의 나머지를 동쪽으로 돌렸고(제7연대전투단 19일, 제65연대전투단 20일), 사단 수색중대가 하진부리까지 나가 제3군단 병력과 만났다[1]. 중공군 제27군은 같은 무렵 제81사단을 앞세워 하배재를 거쳐 속사리로 내려오고 있었다[1]. 20일 하진부리에 모인 병력은 제9사단 40%, 제3사단 34.2%였다[3]. 국군 제1군단장이던 백선엽의 회고도 같은 비율(34%, 40%)을 적는다[4].
5월 21~26일 — 철수 금지 명령과 군단 해체
21일 밴 플리트는 영평 비행장 활주로에서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과 미군 지휘관을 만나 방어선에 "큰 주머니"가 생겼다며, 국군 제1군단은 대관령에서 북서쪽으로, 미군은 하진부 쪽에서 북동쪽으로 치라고 명령했다[4]. 같은 날 그는 하진부리에서 더 물러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제3군단은 영월 등지로 다시 물러났다[3][5]. 담당 지역은 21일 18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으로 넘어갔다[3]. 25일 밴 플리트는 강릉의 국군 전방지휘소를 찾아 군단 해체를 알렸고, 제9사단은 미 제10군단,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으로 넘어갔다. 이때 국군 육군본부의 작전 지휘 기능이 크게 줄고 전방지휘소가 폐지됐다[5]. 백과사전은 해체일을 26일로 적는다[3].
그림 2. 국면별 기동(18초 반복, 동작 줄이기 설정에서는 최종 상황만 표시). 개략·추정 — 자체 제작. OSM 좌표와 Mossman 25장·백과사전 서술 바탕
결심 포인트 심층
국면 제목과 시각은 훈련 시나리오를 따른다. x1과 x3은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열리는 가정 국면이다(그림 3).
그림 3. 결심 흐름과 5월 20일 집결 비율. 국면·시각은 훈련 시나리오, 비율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3] — 자체 제작
p1 하나뿐인 길 (5월 16일 23:00)
알던 것: 정면은 버티고 있었다. 서쪽 인접 사단의 전방 연대가 20시께 연락이 끊겼고, 인접 사단에 철수 허가가 났다는 말과 철수가 흐트러지고 있다는 보고가 함께 들어왔다[1][3]. "중공군이 벌써 고개 남쪽에 있다"는 운전병 소문은 출처를 알 수 없었다. 선택지: 현리에 집결한 채 명령 대기, 1개 대대를 고개 양쪽 능선에 보내고 2개 대대는 예비 유지, 연대 전체로 고개 확보, 수색 소대 먼저 투입. 실제 결심과 결과: 예비 연대는 현리에 있었다. 고개에 아군 경계 병력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섯 시간 뒤 첨병 중대가 고개에 올랐다[3]. 다른 선택이었다면: 현리에서 고개까지는 도로로 10km 남짓이다. 23시에 출발한 대대라면 첨병 중대보다 먼저 능선에 닿을 시간이 있었다. 제27군 본대가 뒤따랐으므로[1] 오래 지키지는 못했겠지만, 차량과 포병을 빼낼 몇 시간은 벌 수 있었다.
x1 고개 위의 새벽 (5월 17일 05:00, 가정)
상황: 아군 대대가 어둠 속에서 능선에 올라 급히 진지를 팠고, 동트기 직전 경무장 첨병 중대가 전초와 부딪친다. 뒤로는 종대가 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고지로 오른다. 권장: 능선을 지키며 적이 다가오게 한다. 근거: 능선을 쥐면 시간은 지키는 쪽 편이다. 시나리오가 실제에 가깝다고 보는 선택(차량·포병을 바로 협곡에 넣기)은 능선이 확실히 아군 손에 있을 때만 성립한다. 실제로 협곡에 먼저 들어선 제30포병대대는 양쪽에서 사격을 받았다[1]. 능선을 내려가 역습하면 비운 능선에 적 후속 부대가 오를 수 있다.
p2 협곡의 차단 진지 (5월 17일 13:00)
알던 것: 도로는 막혔고 적은 고개 양쪽 능선을 쥐었다. 포병대대 생존자는 적이 최소 대대 규모라고 했고, 연락기는 서쪽 계곡에 추가 병력이 있다고 알렸다. "소대 하나뿐"이라는 후송병의 말은 믿기 어려웠다. 군단은 도로를 다시 열라고 명령했다[1]. 선택지: 도로 따라 즉시 공격, 2개 대대로 양쪽 능선부터 탈취, 현리 방어선을 펴고 화력을 맞춰 새벽 공격, 1개 대대로 협곡 입구를 견제하고 동쪽 우회로 수색. 실제 결심과 결과: 연대는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공격했고, 17시 30분께 시작된 시도는 성과 없이 끝났다[1][3]. 다른 선택이었다면: 능선 탈취는 시간이 걸린다. 해가 19시 30분에 졌으므로[13] 13시에 결심했다면 낮 여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실제 공격은 17시 30분에야 시작됐고, 그 사이 차단 부대는 늘었다. 교범은 포위 직후 적이 아직 굳기 전에 돌파하라고 하지만, 정면 도로가 아니라 적의 약한 곳을 찾으라고도 한다[10].
p3 멈춘 공격 (5월 17일 19:30)
알던 것: 선두가 협곡 입구 근처에서 멈췄고 적은 아침보다 늘었다. 포로는 사단 전체가 뒤따른다고 했다. 북쪽 압박은 계속됐다. 선택지: 공격 중지 후 현리 복귀, 야간에 1개 대대를 능선 한쪽에 침투, 포병 집중 후 야간 공격 계속, 입구 발판을 전초로 유지. 실제 결심과 결과: 시도는 끝났고 군단은 현리 일대에 뒤엉킨 채 밤을 보냈다. 살아남은 포병 2개 대대가 현리 부근에 다시 방열했다[1]. 다른 선택이었다면: 달빛 아래 능선 침투는 적의 방식을 되돌려 주는 수였지만[14], 오후 공격에 지친 부대에게는 큰 모험이었다. 시나리오가 이 국면의 어떤 선택에도 '높음'을 주지 않는 이유다.
p4 현리의 밤 (5월 17일 23:00)
알던 것: 2개 사단, 군단 직할부대, 인접 군단에서 흘러온 부대가 계곡에 섞였고 차량은 도로에 늘어섰다[3]. 상급 부대는 남쪽 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릴 것 같았고, 차량을 빼려면 도로를 열어야 했다[1]. 동쪽 능선에는 걸어서는 넘을 수 있는 오솔길이 있었다. 선택지: 구역을 지키며 새벽 재공격 준비, 뒤섞인 부대를 구역별로 단일 지휘 아래 두고 철수로·집결지를 미리 정하기, 안내인과 수색대로 동쪽 오솔길 표시, 명령 없이 밤에 산을 넘기. 실제 결심과 결과: 이튿날 제9사단이 선두, 제3사단이 후위를 맡는 계획이 섰다[1]. 산악 이탈을 대비한 철수로와 집결지 계획은 기록에 없다. 다른 선택이었다면: 이 밤이 사실상 마지막 준비 시간이었다. 교범의 포위 부대 지침은 선임 지휘관이 흩어진 부대를 재편하고, 소속을 잃은 병사를 다른 부대 통제 아래 두며, 모든 포병을 중앙 통제하라고 한다[10]. 1941년판 FM 100-5도 야간 철수 뒤 지정된 집결지에서 부대를 다시 짜라고 하고, 버릴 장비의 파괴 계획을 미리 세우라고 한다[11]. 재공격 준비와 이 두 가지는 함께 할 수 있었다.
p5 다시 고개로 (5월 18일 07:00)
알던 것: 상급 부대는 차량과 화기를 보존한 채 와코선까지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그 전제는 도로 개통이었다[1]. 적은 밤새 진지를 굳혔고 북한군은 북쪽에서 다가왔다. 선택지: 사단 주공으로 도로 따라 재공격, 2개 대대를 양쪽 능선으로 우회시키고 남은 화력 집중, 중장비를 처리하고 후위를 남긴 채 대대 단위 산악 철수 시작, 현리 고수. 실제 결심과 결과: 제9사단이 차단 진지로 나아갔고 제3사단이 후방을 막았다. 오전 중반까지 차단 진지는 그대로였다[1]. 다른 선택이었다면: 상급 명령은 도로 개통을 요구했지만, 공격이 막혔을 때 넘어갈 계획은 없었다. 시나리오가 계획된 산악 철수를 '높음'으로 매기는 까닭은 장비를 버리는 결정 자체보다 그 결정을 언제, 어떤 순서로 내리느냐에 있다. 교범은 돌파 계획에 남길 장비의 파괴 기준을 넣고, 옮길 수 없는 차량과 보급품은 (의료품을 빼고) 파괴하라고 한다[10].
p6 산으로 (5월 18일 10:00)
알던 것: 재공격이 막혔고 북한군 사단이 현리에 닿았다. 군단과의 무전은 아침부터 끊겼다[1]. 선택지: 차량·화포를 두고 각 대대가 곧장 산으로, 1개 대대를 후위로 남기고 중장비를 파괴한 뒤 집결지를 정해 대대 단위 철수, 남은 전력으로 차단 진지를 한 번 더 치기, 현리 방어. 실제 결심과 결과: 두 사단은 도로 동쪽 고지대로 흩어졌고 남은 화포 전부와 차량 300여 대가 남았다[1]. 다른 선택이었다면: 차이는 후위와 집결지에 있다. 1941년판 FM 100-5는 가장 덜 교전 중인 부대가 먼저 빠지고 가장 압박받는 부대가 가장 늦게 남아 전체를 엄호한다고 쓴다[11]. 2023년판 FM 3-90은 철수 부대를 경계부대·본대·예비로 나누고, 적이 앞질러 침투할 수 있으면 전위로 길을 열라고 한다[10]. 18일 오전의 이탈에는 그런 나눔이 보이지 않는다.
x3 능선 위의 후위 (5월 18일 14:00, 가정)
상황: 연대가 질서를 지킨 채 계곡을 벗어났다. 화포는 못 쓰게 만들었고 차량은 불태웠다. 후위가 적 척후를 보고하고, 장교를 잃은 다른 부대 병사들이 대열에 끼어든다. 권장: 낙오병을 대대별로 받아 연대 장교 지휘 아래 넣고 속도를 늦춘다. 근거: 실제로 18일 적의 추격 접촉은 기록돼 있지 않다[1]. 위협은 추격보다 해체였다. 교범은 포위 상황에서 소속을 잃은 병사를 다른 부대 통제 아래 두라고 하고, 지휘관이 자주 모습을 보이며 소문을 막으라고 한다[10].
p7 끊긴 무전 (5월 18일 20:00)
알던 것: 연대는 산길을 따라 크기가 제각각인 무리로 흩어졌다. 연락기가 일부 무리에 남쪽 선의 위치를 떨어뜨렸고 속사리에 낙오병 수집선이 생겼다. 하루치 넘는 식량을 가진 병사는 없었다[1]. 선택지: 밤새 무리별로 수집선까지 걷기, 능선에 멈춰 모아 재편성한 뒤 아침에 이동, 장교를 뒤로 보내 흩어진 병력 수습, 수집선을 건너뛰고 지정된 선으로 직행. 실제 결심과 결과: 병력은 남동쪽으로 계속 흘러갔고, 해 질 녘 군단이 다시 장악한 병력은 대대 규모를 조금 넘었다[1]. 다른 선택이었다면: 이날 밤 추격 접촉이 없었다는 사실[1]은 멈춰서 재편성할 여유가 있었음을 뜻한다. 다만 밤 기온이 5℃ 안팎이었고[13] 식량이 없어 오래 멈출 수는 없었다.
p8 하진부리로 (5월 19일 08:00)
알던 것: 적 접촉은 없었고 병력은 20번 도로로 모여들었다. 지정된 와코선은 수집 지점보다 북쪽이었다[1]. 선택지: 수집 지점에서 연대 재편성, 모인 병력만으로 지정된 선 점령, 미군 수색대와 연락해 상황을 맞추고 도착 순서대로 선 점령, 산속에서 하루 쉬기. 실제 결심과 결과: 와코선에 멈춘 부대는 없었고, 미 제3사단 수색중대가 하진부리에서 제3군단 병력과 만났다[1]. 20일 집결 병력은 원래의 40%와 34.2%였다[3]. 다른 선택이었다면: 같은 시각 중공군 제27군이 하배재를 거쳐 속사리로 내려오고 있었다[1]. 수집선 북쪽의 선을 비워 두면 그 길이 열린다. 인접 미군과 상황을 맞추는 일이 가장 급했다.
교리로 다시 읽기
결정적 지형과 지역 경계(FM 3-90, 3장 3-21항, 13장 13-125~13-132항). 교범은 결정적 지형을 "임무 달성을 위해 반드시 차지하고 지켜야 하는" 핵심 지형으로 정의하고, 지휘관이 그것을 명시하라고 한다[10]. 지역 경계의 한 갈래로 보급로·도로 경계를 들며, 보급로 경계가 작전 지역에서 가장 큰 경계 과제 중 하나라고 쓴다[10]. 제3군단 작전명령에서 고개가 어떻게 다뤄졌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예비대(9장 9-10항). 방어 계획은 예비대 없이도 성공해야 하고, 예비대의 가장 흔한 임무는 미리 준비한 역습이다[10]. 군단 예비 연대의 준비된 계획이 정면 역습이었다면, 등 뒤 도로에 대한 계획은 없었던 셈이다. 시나리오 p1의 '1개 대대만 고개로'는 이 공백을 메우는 절충이다.
철수(11장 11-75~11-80항). 교범은 철수 부대를 경계부대·본대·예비로 나누고, 적이 앞질러 침투할 수 있으면 전위로 철수로를 열라고 한다. 철수는 늘 적의 간섭 아래 시작되므로 압박 속 철수를 기본으로 계획하고, 철수로를 지키는 것을 주요 고려 사항으로 꼽는다[10].
포위 방어와 돌파(부록 C, C-29~C-49항). 포위되면 즉시 사주방어를 펴고, 선임 지휘관이 모든 부대를 장악해 지휘 계통·예비·포병 통제를 다시 세운다(C-30C-32). 돌파는 지휘관이 명령하거나, 방어할 전투력·지형·보급이 없을 때 한다(C-36). 돌파 부대는 전체의 3분의 13분의 2로 꾸린 돌파 부대, 후속·인수 부대, 본대, 후위로 나뉜다(C-37, C-40). 옮길 수 없는 장비의 파괴 기준을 계획에 넣는다(C-39). 돌파는 적이 굳기 전에 빨리 하고, 덜 직접적인 길이라도 적의 약한 곳을 노린다(C-48~C-49)[10]. 17일 오후의 돌파는 빨랐지만 가장 뻔한 길로 갔고, 18일 오전의 재공격은 같은 길을 다시 골랐다. 두 번 모두 후위와 본대의 역할 구분이 기록에 없다.
1951년의 눈으로(FM 100-5, 1941년판 11장). 당시 미 육군 야전교범은 낮 철수가 큰 손실을 부르므로 대부대는 해 질 때까지 버티라고 하고(706항), 밤에는 소부대를 남겨 정상 활동을 흉내 내게 하며(716~717항), 철수 뒤 지정된 집결지에서 부대를 다시 짜라고 한다(719항). 버릴 물자의 파괴 계획은 미리 세운다(700항)[11]. 18일의 이탈은 오전 중반, 곧 한낮에 계획 없이 일어났다. 교범이 피하라고 한 조건이 겹쳤다.
사진 3.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앞줄 왼쪽)이 호주군 제3대대를 사열하는 모습(1951년 12월 4일). 현리 전투 뒤 군단 해체와 국군 작전 지휘 축소를 결정한 지휘관이다 — 사진: Phillip Oliver Hobson(호주 전쟁기념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 via Wikimedia Commons
사료 비판
차단 지점과 부대. 백과사전은 중공군 제20군 제60사단 제178연대 제2대대가 오마치 고개를 점령했다고 쓴다[3]. 미 공간사는 같은 날 차단 부대를 제27군 제81사단으로 보고, 위치를 "상남리 바로 북쪽"으로 적으며 제20군은 예비로 관대리에서 남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쓴다[1]. 두 서술은 같은 도로 위의 서로 다른 지점과 시점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처음 고개에 오른 대대와 그 뒤 차단을 넓힌 사단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원 사료를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그림 1에는 두 위치를 모두 표시했다.
차단 병력의 규모. 백과사전은 17시 30분께 2개 사단 규모가 오마치 고개와 침교를 막고 있었다고 쓰고[3], 공간사는 규모 없이 "더 강한 중공군"으로만 적는다[1]. 고개를 처음 쥔 것은 대대였고, 저녁에는 사단급이 도로 주변에 있었다고 보면 두 서술이 맞는다.
국군 제7사단 부대. 백과사전은 현리에 제7사단 제5연대가 섞여 있었다고 쓰고[3], 공간사는 17일 정오 위치가 확인된 제7사단 보병이 상남리 부근 예비 제3연대 2개 대대뿐이었다고 쓴다[1]. 시점과 장소가 다르므로 둘 다 사실일 수 있다.
와코선까지의 거리. 공간사 24장은 중동부에서 와코선이 무명선 남쪽 918마일이라고 쓰고[2], 25장은 1218마일이라고 쓴다[1]. 1편의 "약 19~29km"는 25장 기준이며, 지도에는 개략선으로만 그렸다.
기간과 해체일. 이 시리즈는 1편과 같이 5월 1620일을 전투 기간으로 잡았다. 언론에는 1622일로 적은 기사도 있다[8]. 군단 해체는 백선엽의 회고와 뉴스타파 기사가 5월 25일 강릉에서의 통보로[5][9], 백과사전은 26일로 적는다[3]. 25일 통보, 26일 시행으로 읽으면 어긋나지 않는다.
손실. 공간사가 확인한 것은 장비 손실(남은 화포 전부, 차량 300여 대)과 집결 비율이다[1][3]. 북한군 제6사단 장교의 포로 약 1,200명 주장은 공간사 각주에 상대 측 주장으로만 실려 있다[1]. 사망자 수는 이번에 확인한 출처 어디에도 근거 있는 숫자가 없어 다루지 않는다.
지휘관 일화. 밴 플리트가 군단장에게 군단의 위치를 묻고 군단장이 모른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널리 돌고, 뉴스타파 기사도 이를 싣는다[9]. 기사는 1차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 이 글은 이 일화를 사실로 다루지 않는다.
교훈
- 퇴로는 정면이다. 부대 전체가 길 하나에 기대면, 그 길의 고개는 전방 진지와 같은 무게로 계획한다. 인접 부대가 흔들리는 순간이 경계 병력을 보낼 시점이다.
- 예비는 둘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분으로 퇴로를 쥐고 나머지를 남기는 절충은 예비를 '쓰는' 일이지 '잃는' 일이 아니다.
- 같은 길로 두 번 치지 않는다. 능선을 쥔 적에게 협곡 바닥 공격이 막혔다면, 다음 공격은 길·시간·방식 중 하나를 바꾼다.
- 버릴 결심은 미리 해 둔다. 장비 파괴 기준, 후위, 집결지, 산길 안내를 전날 밤에 정해 두면 무전이 끊겨도 부대가 대대 단위로 움직인다.
- 섞인 부대에는 한 명의 지휘관. 여러 사단 병력이 한 계곡에 몰리면 소속보다 구역으로 묶어 지휘한다.
- 접촉이 없는 시간도 정보다. 추격이 오지 않는 밤은 재편성의 시간이다. 이웃 부대와 연락해 빈자리를 알리는 일이 그다음이다.
미확인 쟁점
- 군단 예비 연대의 번호와 16일 밤 고개의 아군 경계 여부.
- 오마치 고개의 정확한 위치와 '침교'의 위치. OSM 자료에서 찾지 못해 그림 1은 문헌 서술로 추정했다.
- 처음 고개에 오른 중공군 대대의 소속(제20군인가 제27군인가).
- 18일 오전 이탈 명령이 군단에서 나왔는지, 사단별 판단이었는지.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해당 권 원문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더 보기
▶국방TV 역전다방 143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통한의 현리전투영상: 「역전다방 143회 —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통한의 현리전투」(약 47분). 강원도 지형, 국군 제7사단 정면 붕괴, 철수로 문제를 지도로 설명한다 · 국방홍보원 국방TV(KFN), 2024
- Mossman, Ebb and Flow 24·25장[2][1]. 무명선·와코선 계획과 5월 공세의 군단별 경과.
- 미 육군 FM 3-90 Tactics(2023) 3·9·11·13장과 부록 C[10].
- 훈련 시나리오 '현리 전투'에서 5월 16일 밤 군단 예비 연대장이 되어 직접 결심해 볼 수 있다.
출처
-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미 육군 군사사센터(CMH), 1990, 25장 "Battle Below the Soyang"(Korean War Online 전사본). https://www.koreanwaronline.com/history/EbbAndFlow/Ch25.htm (접속 2026-10-14)
- Billy C. Mossman, 같은 책 24장(Korean War Online 전사본). https://www.koreanwaronline.com/history/EbbAndFlow/Ch24.htm (접속 2026-10-14)
- 박동찬, 「현리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2024 수정).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324 (접속 2026-10-14)
- 백선엽, "[The front line] PLA loses bid to take Gangneung"(연재 60 years with the military), Korea JoongAng Daily, 2010-12-05. https://www.koreajoongangdaily.com/lifestyle/the-front-linepla-loses-bid-to-take-gangneung/10486855 (접속 2026-10-14)
- 백선엽, "[The front line] U.S. disbands ROK's 3rd Corps"(연재 60 years with the military), Korea JoongAng Daily, 2010-12-12. https://www.koreajoongangdaily.com/lifestyle/the-front-lineus-disbands-roks-3rd-corps/10610006 (접속 2026-10-14)
- 미 육군 군사사센터(CMH), The Korean War: Restoring the Balance, 25 January–8 July 1951(CMH Pub 19-9, Korean War Online 전사본). https://koreanwaronline.com/history/CMH%20MilitaryHistory/RestoringTheBalance.htm (접속 2026-10-14)
- 국가기록원, 「6·25전쟁의 진행 과정: 중공군 개입과 유엔군 재반격(1950.10.19~1951.7.9)」. https://theme.archives.go.kr/next/625/process/china-intervention.do (접속 2026-10-14)
- 김대호(강원일보), "[한국전쟁 정전 70년] 최후의 전쟁, 백마고지 전투", 전북일보 인터넷판, 2023-05-22. https://www.jjan.kr/article/20230522580339 (접속 2026-10-14)
- 김진혁, "전시작전통제권과 세 명의 대통령", 뉴스타파, 2014-11-19. https://newstapa.org/article/V_XIA (접속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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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media Commons, File:Soyang River Valley, September 1951.jpg(CC BY 2.0, 미 해병대 역사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oyang_River_Valley,_September_1951.jpg (접속 2026-10-14)
- Wikimedia Commons, File:Battle of Soyang River map.jpg(퍼블릭 도메인, 원자료 Mossman 1990, 지도 35).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attle_of_Soyang_River_map.jpg (접속 2026-10-14)
- Wikimedia Commons, File:General James Van Fleet inspects 3RAR.jpg(퍼블릭 도메인, 호주 전쟁기념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General_James_Van_Fleet_inspects_3RAR.jpg (접속 2026-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