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사례 분석
심층 분석 | 안케패스 전투 — 고지를 잡은 날과 길이 열린 날은 왜 사흘 차이가 났나
· 1972-04-11 – 1972-04-27
개요
1편: 안케패스 전투 (1972년 4월)이 "도로를 열려면 고지부터"라는 큰 구도를 다뤘다면, 이 글은 그 안의 작은 결정과 시간 간격을 들여다본다. 맹호부대 기갑연대는 4월 11일부터 638고지를 공격했고, 열흘 넘게 막혔던 공격은 22일 해 질 무렵 2중대가 적 제1선을 뚫으면서 풀렸다[1]. 고지는 24일 확보됐지만 19번 도로는 27일 오후에야 공식 개통됐고, 그날도 전차만 고개를 넘었다[2][5]. 고지 확보와 도로 개통 사이의 사흘은 실패가 아니라 '탈취'와 '소탕'이 서로 다른 과업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래에서는 표고·기상 수치로 지형을 다시 읽고, 훈련 시나리오의 국면 p1~p8(가정 국면 p2x·p5x 포함)을 하나씩 따라간다.
사진 1. 2010년 3월의 안케 고개(지아라이성–빈딘성 경계). 도로가 급경사면을 감아 오르고, 양옆 사면이 도로를 내려다본다 — 사진: NDS(베트남어 위키백과 사용자),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18]
전략·작전 맥락
1972년 3월 말 시작된 부활절 공세에서 북베트남군은 중부 고원의 꼰뚬과 해안의 빈딘성을 함께 압박했다. 4월 26일 AP의 피터 아넷은 플레이쿠발 기사에서 북베트남군이 약 2주 전 안케 고개를 장악해 해안 보급 기지와 플레이쿠·꼰뚬 사이의 19번 도로를 끊었고, 이것이 하노이 계획의 "1단계"라고 썼다[7]. 같은 기사는 인구 약 100만의 빈딘성에서 호아이안군이 그 전 주에 떨어졌다고 전한다[7]. 베트남 측 기록도 호아이안 해방일을 1972년 4월 19일로 적는다[11]. 4월 28일 AP는 공산군의 목표가 고원과 빈딘성을 잡아 남베트남의 "허리"를 끊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3].
19번 도로 안케 고개는 수도사단에게 낯선 땅이 아니었다. 미 육군 군사사센터의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에 따르면 수도사단은 1965년 11월 퀴논 서쪽에 자리 잡았고, 첫 임무 가운데 하나가 안케 쪽으로 19번 도로를 열어 두는 일이었다. 1966년 6월에는 19번 도로를 따라 안케 고개까지 통제 지역을 넓혔다[9]. 1972년 5월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기자 할 드레이크는 맹호부대가 산과 덤불 3,600m와 안케 고개의 "턱"을 맡고 있었다고 썼다[6]. 1954년 프랑스군 제100기동단이 이 일대에서 무너졌고, 그 녹슨 잔해는 불과 몇 해 전에야 치워졌다는 대목도 있다[6]. 고개는 쥔 쪽에 따라 관문도 되고 올가미도 됐다.
상급 지휘부의 기대는 워싱턴 기록에도 남아 있다. 4월 26일 백악관 특별행동그룹(WSAG) 회의에서 무어러 합참의장은 한국군이 안케 고개의 고지를 확보했으며 19번 도로 개통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고했다. 도로가 열렸느냐는 질문에는 "아니다. 그러나 곧 열릴 것"이라고 답했다[8]. 같은 회의에서는 한국군에게 퀴논 북쪽 지역과 19번 도로 개통을 더 맡아 달라고 요청하는 방안이 논의됐다[8]. 서울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4월 25일 주월 한국군 사령관에게 전문을 보내 안케 고개·638고지 작전을 치하했고, 국방부 장관은 하루 전 맹호부대의 638고지 재탈환을 축하했다[5]. 638고지는 한 대대의 전술 목표였지만 그 결과는 동맹 정치의 언어로도 읽혔다.
지형·기상 정밀 분석(OAKOC)
그림 1. 안케 고개·638고지 상세도(개략·추정). 표고는 Open-Meteo DEM 격자값[14], 고개 위치는 OSM[15], 진지선과 부대 위치는 서술 바탕의 추정이다 — 자체 제작. 출처 1–6 바탕
관측·사계(O). OSM이 '안케 고개'로 표시한 지점은 표고 약 495m다[15][14]. 같은 DEM 격자로 보면 고개 바로 북쪽 능선은 550600m, 북쪽 약 4km 지점은 700m 안팎이고, 서쪽 안케 고원은 430450m, 동쪽 해안 쪽 평지는 100m 아래다[14]. 고개에서 동북쪽으로 약 2.6km 내려간 도로 위 지점이 약 145m이니, 도로는 짧은 거리에서 350m가량을 오르내린다[14][15]. 능선 위의 적은 동쪽 사면을 오르는 도로를 수 km에 걸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반대로 가까운 거리의 사계는 좁았다. 바위와 나무뿌리, 덤불이 시야를 막았고[1], 드레이크는 마른 나뭇가지와 잎으로 덮어 나무처럼 보이게 만든 북베트남군 참호를 묘사한다[6].
접근로(A). 기계화 접근로는 19번 도로 하나였다. 그러나 이 길은 바로 적이 감제하는 길이었다. 보병 접근로는 도로 쪽에서 능선으로 오르는 동쪽 지릉들과, 고지의 봉우리 사이를 잇는 안장부였다. 드레이크에 따르면 한국군은 처음에 고지의 한 봉우리만 잡았고, 긴 안장부를 넘는 힘든 전진 끝에 다음 봉우리로 올라섰다[6]. 시나리오 정보는 도로 남쪽 능선에도 소규모 차단조가 있었다고 본다. 고개 남쪽 590m 봉우리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문기둥' 역할을 했다는 드레이크의 표현과 맞는다[6][14].
핵심 지형(K). 드레이크는 북베트남군이 638고지를 노린 이유를 그것이 안케 고개의 "자물쇠"였기 때문이라고 썼다[6]. FM 3-90은 결정적 지형을 "임무 달성을 위해 반드시 탈취·확보해야 하는 핵심 지형"으로 정의한다[12]. 기갑연대의 목표는 도로였지만 결정적 지형은 638고지였다. 그 고지 안에서도 봉우리마다 의미가 달랐다. 먼저 잡은 봉우리는 발판이었고, 안장부 너머 정상이 진짜 자물쇠였다.
장애물(O). 자연 장애물로는 급경사와 바위, 나무뿌리가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것들 때문에 2인 1조 공격까지 실패했다고 적는다[1]. 인공 장애물도 있었다. 드레이크는 깡통을 매단 가시덤불이 조기 경보선 노릇을 했다고 전한다[6]. 도로 위에는 2주 전 매복에 당한 차량, 폭탄 구덩이, 부서진 배수로가 남아 있었고[2], 이것이 고지 확보 뒤 사흘을 잡아먹었다.
은폐·엄폐(C). 북베트남군 진지는 큰 바위 아래 동굴 같은 틈에 자리 잡았다. 포병과 박격포가 찾아오면 승무원이 지하 참호로 기어들어 갔다가 사격이 그치면 돌아왔다[6]. 네이팜이 고지를 검게 태우고도 진지를 없애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2]. 적 지휘관용 엄체는 서늘하고 넓어서 전투 뒤 한국군 지휘소로 쓰였다[6].
기상. ERA5 재분석 자료로 보면 전투 첫날인 4월 1011일에는 비가 각각 약 37mm, 11mm 내렸고 구름량은 100%와 94%였다. 1322일은 대체로 건조해 최고기온이 2932℃였다. 22일은 최고 30.2℃, 강수 1.6mm, 구름량 69%였다. 2325일은 구름량 96~98%로 흐렸고, 24일에는 약 19mm의 비가 왔다[13]. 정상 근접전과 도로 정리가 흐리고 비 오는 날에 걸쳤다는 뜻이다. 항공 지원이 그만큼 어려웠을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 항공 기록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같은 자료의 일몰은 현재 베트남 표준시(UTC+7)로 17시 59분이다[13]. 당시 남베트남은 UTC+8을 썼으므로 22일 일몰은 19시 무렵이 된다(필자 환산). 18시 15분의 돌파는 해 지기 약 45분 전이었다. 재분석 격자는 산 사면의 국지 기상을 평평하게 만든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편성과 지휘 관계
대대·중대급까지 확인되는 쪽은 한국군이다. 북베트남군은 연대급까지만 확인되며, 표의 "추정"은 서술에서 끌어낸 부분이다.
| 측 |
제대 |
부대·요소 |
역할·장비 |
근거 |
| 한국군 |
군 |
주월 한국군 사령부(사령관 중장) |
4.25 대통령 치하 전문 수신 |
[5] |
| 한국군 |
사단 |
수도사단(맹호부대) |
안케 고개 일대 책임. 사단장은 13개 중대가 투입됐다고 밝힘 |
[6][9] |
| 한국군 |
연대 |
기갑연대(1기갑연대) |
638고지 공격의 주체 |
[1] |
| 한국군 |
대대 |
2대대 |
4.21까지 열흘째 공격 답보 |
[1] |
| 한국군 |
중대 |
2중대 |
4.22 08시 선두. 1소대장 임동춘 중위가 18:15경 제1선 돌파 |
[1] |
| 한국군 |
소대 |
다른 중대의 24명 공격조(소대장 중위) |
고지 확보일에 부서진 나무 줄을 지나 공격 |
[6] |
| 한국군 |
지원 |
장갑차(APC), 공병, 박격포 진지, 근접항공지원(네이팜) |
도로 진출·정리, 화력 지원 |
[2][3][6] |
| 미군 |
고문 |
고원지대 미 수석 고문관 존 폴 반 |
4.26 고개 확보 발표에 참여 |
[3] |
| 북베트남군 |
사단 |
제3사단(사오방) |
주력은 빈딘성 북부 압박 |
[3][7][11] |
| 북베트남군 |
연대 |
제12연대(증강) |
638고지 정상·사면 강화 진지. 한국 측은 연대 병력 약 3분의 1 손실 주장 |
[1][6] |
| 북베트남군 |
소부대 |
공병(공작조) |
폭약 가방·폭약 장대로 야간 습격 |
[6] |
| 북베트남군 |
대대 |
미상(추정 2~3개 대대) |
1개 연대 규모에서 추정 |
추정 |
눈에 띄는 점은 세 가지다. 첫째, 13개 중대라는 숫자는 한 대대의 몫을 크게 넘는다[6]. 공격이 2대대만의 일이 아니라 연대 전체, 어쩌면 사단 다른 부대까지 번갈아 들어간 소모전이었다는 뜻으로 읽힌다(추정). 둘째, 한국군은 1966년 이후 미군과 공식 작전통제 협정 없이 비공식 양해와 연락장교로 협조했다[9]. 1972년 4월에도 고개 확보 발표는 한국군 대변인과 미 고문관이 함께 했다[3]. 셋째, 한국 측 기록은 '2대대가 답보'였고 '2중대'가 선두에 섰다고 적는데, 이 둘의 관계는 아래 사료 비판에서 다시 짚는다.
시간대별 경과
4월 11일 — 고개가 막히다
기갑연대는 안케 계곡에서 북베트남군 제3사단 제12연대와 교전을 시작했다[1]. 성조지와 AP는 전투 시작일을 4월 11일로 적고, 도로 위 차량은 "2주 전 매복"에 당했다고 전한다[3][2]. 드레이크가 소개한 한 일병은 어둠 속 진지에서 다섯 명의 공작조를 막아 무공훈장을 받았는데, 기사는 그 날짜를 "3월 11일"로 적는다[6]. 전투 시작일과 겹치는 4월 11일의 오기로 보인다(사료 비판 참고).
4월 12~21일 — 사면의 소모전
공격은 중대 단위로 사면을 오르는 소모전이 됐다. 네이팜이 고지를 검게 그을렸지만 정상과 사면의 강화 진지는 살아남았다[2]. 한국군은 고지의 한 봉우리를 먼저 잡았으나, 긴 안장부 너머 다음 봉우리에는 녹색 베레모를 쓴 정예로 보이는 적이 버텼다[6]. 박격포 진지 하나는 적 사격에 무너져 4명이 전사했다[6]. 그사이 해안 쪽에서는 19일 호아이안이 떨어졌다[11][7]. 21일 저녁 작전은 열흘째였고 2대대의 공격은 답보였다[1].
4월 22일 — 네 번의 공격
08시 2중대가 선두에 섰다. 10시와 13시 공격이 실패했고, 15시 2인 1조로 바위 사이를 붙어 오른 세 번째 공격도 경사와 나무뿌리, 바위에 막혔다[1]. 15시 10분 네 번째 공격에서는 중대장이 소대장 자리에, 소대장이 분대장 자리에 서고 분대장이 맨 앞에 섰다[1]. 18시 15분경 1소대장 임동춘 중위가 적 제1선 진지에 수류탄을 직접 던져 돌파구를 열었다. 그는 B-40 로켓 파편에 다리를 다치고도 제2선으로 나아갔고, 저격으로 소대원 4명이 다치는 가운데 앞장서 적진을 돌파하다 전사했다[1]. 1972년 5월 3일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다[1].
4월 23~24일 — 정상 근접전
UPI는 한국군이 사흘간의 근접전 끝에 고지를 잡았고, 양측 전사자가 사면 곳곳에 남아 있었다고 전했다[4]. 드레이크는 고지 확보일에 다른 소대장이 24명의 공격조를 이끌고 부서진 나무 줄을 지나 공격했다고 쓴다[6]. 서울발 AP는 국방부 장관이 월요일(24일) 638고지 재탈환을 축하했다고 보도했다[5]. 전우회도 24일을 고지 확보일로 기념한다[10].
4월 25~26일 — 고지는 잡았지만
UPI는 고지 확보 뒤에도 고개가 여전히 막혀 있고, 뚫으려면 잘해야 사흘은 더 싸워야 한다는 AP 판단을 실었다[4]. 26일(수) 한국군 대변인과 존 폴 반은 2주 넘는 전투 끝에 고개를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장갑차를 따라 올라간 보병 1개 중대는 저항 없이 고개 정상에 닿았다가 본선으로 돌아왔다[3]. 같은 날 워싱턴 회의에서도 도로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고 보고됐고[8], 퀴논 쪽에서는 부서진 배수로와 노면 때문에 도로가 막혀 있다는 보고가 나왔다[3].
4월 27일 — 개통 선언
공병이 하루 종일 부서진 배수로를 돌아가는 우회로를 내고, 폭탄 구덩이를 메우고, 매복으로 파괴된 차량을 치웠다. 고개는 목요일 오후 공식 개통됐지만 시간이 늦어 차량 통행이 안전하지 않았고, 보도 시점까지 고개를 지난 것은 전차뿐이었다[2].
그 뒤 — 5월 초의 고지
5월 초 고지를 찾은 기자들은 저지대에 북베트남군 연대의 잔존 병력이 아직 있으니 빨리, 조심해서 걸으라는 주의를 받았다[6]. 고개는 열렸지만 주변은 아직 안전하지 않았다.
사진 2. 1969년 8월 22일 '서프라이즈 작전' 중 안케 고개 남쪽 약 8km에서 쉬는 맹호부대 기갑연대 1대대 2중대. 같은 연대가 3년 뒤 이 고개를 다시 열었다 — 사진: SP4 Scott, 미 육군(NARA 111-CCV-534-CC40864), 퍼블릭 도메인, via Wikimedia Commons[19]
결심 포인트 심층
국면 제목은 훈련 시나리오를 따른다. p2x와 p5x는 실패 분기에서 열리는 가정 국면이다(그림 2).
그림 2. 결심 흐름, 4월 22일 공격 경과, 한국군 손실 수치 비교. 국면은 훈련 시나리오, 시각은 출처 1, 손실 수치는 출처 2·6·10 — 자체 제작
p1 끊긴 19번 도로 (4월 11일)
알던 것: 고개에서 도로가 끊겼고, 고갯길에 매복에 당한 차량이 서 있다. 적은 도로 양쪽 고지에서 길을 내려다본다. 사단 정보는 적을 제3사단 예하 1개 연대로 봤다. "적은 소수라 장갑차로 밀면 흩어진다"는 후방 소문도 있었다. 선택지: 장갑차 호위로 차량 행렬 돌파, 고지의 적 진지 직접 공격, 고개 봉쇄 후 화력 우선, 기지만 지키고 도로는 남베트남군에 넘기기. 결심: 연대는 도로를 감제하는 고지를 목표로 삼았다[1]. 다른 선택이었다면: 행렬을 밀어붙였다면 고지가 그대로 남아 도로 위 잔해만 늘었을 것이다. 1954년 프랑스 기동단이 이 일대에서 무너진 방식이 바로 감제된 도로 위의 차량 종대였다[6]. 화력만 앞세웠다면, 바위 아래 지하 참호로 피했다 돌아오는 적의 진지 구조로 보아[6] 시간만 더 들었을 것이다.
p2 사면의 소모전 (4월 중순)
알던 것: 사면 아래쪽 발판은 얻었지만 정상은 멀었다. 네이팜이 그쳐도 사격이 되살아났고, 탄약 추진과 부상자 후송에 인원이 많이 빠졌다. "적이 정상에서 빠진다"는 미확인 관측도 있었다. 선택지: 화력 지원 아래 중대 공격 지속, 야간 침투, 보병을 물리고 화력만 사용, 재편 후 다른 대대에 인계 건의. 결심: 중대 단위 공격으로 접촉을 유지했다[1][2]. 다른 선택이었다면: 접촉을 끊고 화력만 쓰면 적이 비워 준 사면을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야간 침투는 적의 깡통 경보선과 공작조 습격[6]을 생각하면 위험이 컸다. 사단장이 밝힌 13개 중대 투입[6]은 이 단계가 중대를 갈아 넣는 교대 공격이었음을 시사한다.
p2x 사면에 묶인 중대들 (가정)
상황: 공격이 꺾여 중대들이 바위 틈에 엎드려 있고 탄약은 줄어든다. 한 중대와는 무전이 끊겼다 이어진다. 권장: 얻은 자리를 지키며 탄약을 올리고 중대를 교대시킨다. 근거: 실제로 대대는 사면에서 물러나지 않았다[1]. FM 3-90은 공격 속도를 유지하는 기법으로 "부대가 한계에 이르기 전에 예정된 교대"를 든다(3-20항)[12]. 근접 화력을 바로 앞에 부르는 선택은 아군과 적 진지가 너무 가까워 위험했다.
p3 열흘째의 답보 (4월 21일 저녁)
알던 것: 적 진지는 제1선과 그 뒤 제2선으로 겹쳐 있고, 제1선까지 거리는 멀지 않았다. 2중대장은 중대 상태가 좋으니 선두를 맡겨 달라고 했다. 포로 진술로는 적이 곧 물러난다고 했지만 통역을 거친 신뢰도 낮은 정보였다. 선택지: 2중대 선두에 화력 집중, 전 중대 동시 공격, 하루 늦추고 공습 추가, 야간 수색 후 방향 결정. 결심: 22일 08시 2중대가 선두에 섰다[1]. 다른 선택이었다면: 넓은 정면 동시 공격은 험한 지형에서 화력을 쪼갠다. 하루를 더 기다리는 안은 이미 열흘간 화력이 진지를 없애지 못했다는 사실 앞에서 근거가 약했다. 22일이 비교적 맑았던 반면 23~25일은 흐리고 비가 왔다는 점[13]도 돌아보면 하루 미루는 쪽이 불리했다.
p4 멈춰 선 공격 (4월 22일 13시)
알던 것: 10시와 13시 공격이 실패했다. 대형을 갖춘 공격은 안 되고, 소수 인원이 바위 사이로 붙어야 한다는 것이 중대장 판단이었다. 근접항공지원은 요청할 수 있지만 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해 질 때까지 여섯 시간이 채 안 남았다. 선택지: 공격을 멈추고 화력에 맡기기, 다른 능선으로 주공 전환, 지휘자가 앞장서 2인 1조로 계속, 증원 대기. 결심: 15시 2인 1조 공격이 막히자 15시 10분 지휘자들이 한 단계씩 앞으로 나섰고, 18시 15분경 제1선이 뚫렸다[1]. 다른 선택이었다면: 주공을 옮기려면 부대를 사면에서 빼 다시 붙여야 하고, 그 사이 날이 저문다. 측면 능선에도 진지가 이어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지휘자 손실이라는 대가가 컸다. 돌파를 연 소대장은 그날 저녁 전사했다[1].
p5 제1선 돌파 (4월 22일 18시 15분)
알던 것: 선두 소대가 제1선에 들어갔고, 위쪽 제2선에서 B-40 로켓과 저격이 날아왔다. 소대장이 다쳤지만 전진 중이었다. 일몰까지 45분 남짓이었다(필자 환산)[13]. 선택지: 제2선으로 계속 밀며 후속 소대로 돌파구 유지, 제1선을 굳히고 아침에 재공격, 출발선으로 물려 포병 사격, 장갑차로 사면 직접 사격. 결심: 선두는 제2선으로 계속 나아갔다[1]. 전투는 고지 위에서 이어졌고 사흘 뒤 정상이 떨어졌다[4][5]. 다른 선택이었다면: 출발선으로 물리는 안은 하루 종일 싸워 얻은 제1선을 내주는 일이었다. 장갑차를 도로에 올려 사면을 쏘게 하는 안은 바로 그 도로가 적의 감제 아래 있었다는 점에서 효과보다 위험이 컸다.
p5x 고지 앞의 밤 (가정)
상황: 공격이 고지 앞에서 멈춘 채 밤을 맞았고, 탄약은 절반 아래, 특히 수류탄이 모자란다. 위쪽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권장: 자리를 지키며 밤새 탄약을 올리고, 날이 밝으면 지휘자가 앞장서 다시 공격한다. 근거: 사면을 버리면 다시 올라갈 사면 전체를 처음부터 사야 한다. 적은 밤에 공작조로 습격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6] 청음초와 경계를 두껍게 하는 것이 먼저다.
p6 정상의 근접전 (4월 23~24일)
알던 것: 정상 진지들은 사계가 서로 겹쳐 하나를 치면 옆에서 사격이 왔다. 일부가 북쪽으로 빠진다는 관측이 있었다. 날씨는 흐려졌다[13]. 선택지: 소부대로 진지를 하나씩 끊어 정리하고 정상 뒤편에 항공 화력, 가용 중대 총돌격, 하루 동안 화력 집중, 정상은 포위만 하고 도로 쪽부터 정리. 결심: 근접전으로 진지를 하나씩 정리해 24일 고지를 확보했다[4][5]. 드레이크는 소대장이 이끈 24명 공격조와 손으로 맞붙는 백병전을 묘사한다[6]. 다른 선택이었다면: 서로 엄호하는 진지 정면으로 총돌격하면 빨랐더라도 손실이 컸을 것이다. 정상을 남겨 두고 도로 쪽만 정리하는 안은 p1의 판단, 곧 고지를 남기면 도로가 쓸모없다는 판단을 스스로 뒤집는 일이었다.
p7 고지는 잡았지만 길은 아직 (4월 25~26일)
알던 것: 고지는 확보했지만 도로에는 폭탄 구덩이, 부서진 배수로, 매복 피해 차량이 있었다. 주변 능선 잔존 병력 규모는 모르고, 적 주력은 도로 북쪽에 있었다. 선택지: 바로 개통 선언과 차량 투입, 주변 능선 전부 수색 후 개통, 장갑차·보병 중대로 고개 정상 확인 후 공병 투입, 고지만 지키고 남베트남군에 인계. 결심: 장갑차를 앞세운 보병 중대가 고개 정상까지 갔다가 돌아왔고, 공병이 뒤를 이었다[3][2]. 다른 선택이었다면: 바로 차량을 넣었다면 구덩이와 잔해 앞에서 행렬이 엉켜 공병 작업까지 막혔을 것이다. 전 능선 수색은 안전하지만 퀴논 쪽에서 북베트남군이 다시 내려오면 도로가 또 닫힐 수 있다는 당시 우려[3]를 생각하면 너무 느렸다.
p8 고개를 여는 날 (4월 27일 오후)
알던 것: 우회로와 구덩이 메우기는 끝났지만 노면이 약했다. 해는 기울었고 고원으로 갈 차량이 기다렸다. 적이 다시 내려올 수 있다는 정보와 "고개 너머에 새 매복이 깔렸다"는 운전병 소문이 함께 들어왔다. 선택지: 개통 선언 후 오늘은 전차만 통과, 오늘 저녁 보급 행렬 출발, 경계를 남베트남군에 넘기고 고지로 복귀, 이틀 더 정리 후 개통. 결심: 목요일 오후 개통을 선언했지만 늦은 시간 탓에 전차만 지났다[2]. 다른 선택이었다면: 해 질 녘 행렬은 약한 노면과 어둠 속 매복 위험을 함께 진다. 이틀을 더 미루면 고원은 그만큼 더 기다린다. 실제 결심은 '선언'과 '통행'을 나눠 정치적 시한과 전술적 안전을 함께 챙긴 절충이었다.
교리로 다시 읽기
그림 3. 국면별 기동(18초 반복, 동작 줄이기 설정에서는 최종 상황만 표시). 개략·추정 — 자체 제작. DEM 격자[14]와 당시 보도[2]–[6] 바탕
결정적 지형(FM 3-90, 3장 3-21항). 교범은 핵심 지형과 결정적 지형을 일찍 탈취·확보하면 적을 압도할 수 있다고 하고, 결정적 지형이 있으면 지휘관이 그것을 지정해 작전 개념에서의 중요성을 알리라고 한다[12]. 기갑연대가 p1에서 행렬 돌파 대신 고지를 택한 것이 바로 이 지정이다. 다만 '일찍'은 이루지 못했다. 적이 먼저 고지를 차지하고 진지를 다진 뒤였기 때문이다.
정면 공격(2장 2-27~2-28항). 교범은 공격할 측방이 없을 때 정면 공격이 불가피하며, 압도적 전투력이 없으면 정면 공격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쓴다[12]. 남북으로 길게 뻗은 능선 위 진지를 동쪽 급경사에서 오르는 공격에는 돌아갈 측방이 마땅치 않았다. 16일간의 소모전은 교범이 경고한 비용 그대로였다.
주공 전환과 성공 지원(5장 5-47~5-49항). 교범은 공격이 전진과 돌격의 연속이며, 지휘관은 기회와 기세를 살리려 주공을 옮기고 성공을 강화하며, 하급 부대의 정렬을 지키려고 공격을 늦추지 말라고 한다[12]. 22일 2중대에 화력과 지원을 몰아준 것(p3), 제1선을 뚫은 뒤 제2선으로 계속 민 것(p5)이 이 원칙에 들어맞는다. 같은 항은 실패한 공격을 버릴 준비도 요구한다. 10시와 13시의 실패 뒤에도 같은 축을 고집한 것이 옳았는지는, 그날 저녁 돌파라는 결과가 정당화했을 뿐 사전에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탈취와 소탕(부록 B, B-57·B-16항). 교범에서 '탈취(seize)'는 압도적 전투력으로 지정 지역을 차지해 적이 그곳에 직접 사격을 할 수 없게 하는 과업이다. '소탕(clear)'은 지정 지역 안의 적을 모두 없애는 과업으로 상당한 시간과 자원이 들고 철저한 정찰이 필요하다[12]. 24일의 638고지는 탈취였고, 27일의 도로 개통은 고개 일대의 소탕과 공병의 장애물 제거가 끝난 뒤였다. 두 과업 사이의 사흘은 교범이 예고한 시간이다.
강화(1장 1-123~1-124항). 교범은 탈취한 진지를 강화할 때 정찰, 경계, 잔존 저항 거점 제거, 역습 대비 배치, 화력 계획 조정, 후속 임무 준비를 하라고 한다[12]. p7의 장갑차·보병 정찰과 공병 투입, p8의 고지 경계가 이 목록을 따른다.
임무형 지휘(ADP 6-0, 2019). 2019년판 ADP 6-0은 임무형 지휘를 하급 제대의 결심을 넓히고 실행을 분권화하는 방식으로 정의한다[16]. 22일 15시 10분 지휘자들이 한 단계씩 앞으로 나선 장면은 분권화라기보다 지휘자가 직접 몸으로 공격 속도를 정한 경우에 가깝다. 대형이 유지되지 않는 지형에서 분대장이 결심의 주체가 되도록 위에서 자리를 내려 준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미 육군 공간사는 한국군의 고지 공격이 B-52·포병·전차 지원을 갖추느라 준비에 한 달이 걸리기도 했다는 에이브럼스의 평가를 전한다[9]. 1972년의 안케에는 그런 준비 시간이 없었고, 그 공백을 소부대 지휘자의 솔선이 메웠다.
사진 3. 1969년 8월 22일, 맹호부대 기갑연대장이 사단 담당 미 연락장교에게 안케 고개 남쪽 약 8km에서 벌인 연대 작전을 설명하고 있다. 한미 협조가 공식 작전통제가 아니라 연락장교로 이뤄졌음을 보여 준다 — 사진: SP4 Scott, 미 육군(NARA 111-CCV-534-CC60866), 퍼블릭 도메인, via Wikimedia Commons[20]
사료 비판
한국군 손실. 같은 전투를 두고 네 가지 수치가 있다. AP는 4월 29일 한국군 공식 집계를 전사 51명, 부상 115명으로 전하면서, 정통한 소식통은 전사 110명, 부상 384명으로 공식 수치의 두 배가 넘고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단일 전투로는 가장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고 썼다[2]. 5월 6일 드레이크는 한국 측 수치로 전사 41명을 적는다[6]. 전우회는 전사 173명, 부상 400여 명을 든다[10]. 공식 수치는 전투가 끝나기 전의 중간 집계이고, 638고지 전투만 셌을 가능성이 있다. 전우회 수치는 작전 전체와 이후 사망자까지 포함했을 수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국방부 『파월한국전쟁사』 원문으로 확인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범위가 가장 넓은 수치와 가장 이른 수치를 함께 적는 것이 안전하다.
북베트남군 손실. 한국군 사령부는 4월 11일 이후 705명을 주장했다[3]. 4월 26일 워싱턴 회의에서 무어러 합참의장은 같은 전투에서 238명이라는 한국 측 보고를 전했다[8]. 날짜가 겹치는데 수치가 세 배 가까이 다르다. 독립적으로 확인된 숫자는 없으며 모두 '주장'으로 다뤄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연대 병력 약 3분의 1 손실"도 한국 측 주장이다[1].
날짜. 드레이크 기사는 고지 확보일을 "3월 24일", 한 일병의 공적일을 "3월 11일"로 적는다[6]. 그러나 같은 기사가 16일간의 전투라고 쓰고, 다른 보도는 모두 4월 11일 시작과 4월 24일 확보를 가리킨다[3][5][10]. '4월'의 오기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도로 개통도 26일 발표(한국군 대변인·미 고문관)와 27일 공식 개통이 엇갈린다[3][2]. 26일은 고개 정상 확인, 27일은 공병 작업이 끝난 시점으로 나눠 읽으면 두 보도가 함께 맞는다.
중대와 대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2대대"의 전투가 답보였고 "2중대"가 선두에 섰으며, 임동춘 중위가 "1기갑연대 2중대 1소대장"이었다고 적는다[1]. 그런데 1969년 미 육군 사진 설명은 같은 연대의 2중대를 "1대대 2중대"로 적는다[19]. 한국군 연대는 중대 번호를 연대 단위로 이어 매기므로 2중대는 보통 1대대 소속이다. 1972년에 2중대가 2대대에 배속됐을 수도 있고, 백과사전의 '2대대'가 다른 맥락일 수도 있다. 훈련 시나리오는 플레이어를 2대대장으로 두지만, 이 관계는 원전 확인이 필요하다.
적 규모. 한국 측 백과사전은 "제3사단 12연대", 드레이크는 "증강된 연대"로 적는다[1][6]. 같은 사단의 다른 연대들은 빈딘성 북부에서 남베트남군을 압박했다는 AP 보도[7]와 맞물려, 안케의 적은 사단 주력이 아니라 사단 주력의 측방을 지키는 차단 부대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추정).
교훈
- 목표와 결정적 지형을 구분한다. 목표는 도로였지만 결정적 지형은 고지였다. 이 구분을 첫날 내린 것이 이후 모든 결심의 기준이 됐다.
- 화력은 진지를 흔들 뿐, 지우지 못한다. 바위 아래 지하 참호는 네이팜과 포병을 견뎠다. 마지막 수십 m는 화력이 그친 순간 붙어 있는 보병의 몫이다.
- 지휘자의 위치가 공격 속도를 정하는 지형이 있다. 대형이 깨지는 사면에서는 한 단계씩 앞으로 나선 지휘자가 공격을 움직였다. 그만큼 지휘자 손실에 대비한 승계 계획이 필요하다.
- 탈취와 소탕은 다른 과업이다. 고지를 잡은 날과 길이 열린 날 사이의 사흘은 계획에 처음부터 넣어야 할 시간이다. 공병과 기동 부대는 탈취 직후 바로 이어 붙인다.
- 선언과 통행을 나눈다. 상급 부대와 정치가 바라는 시한은 '선언'으로 맞추고, 차량은 현장이 안전을 확인한 뒤 보낸다.
미확인 쟁점
- 638고지의 정확한 좌표. 그림 1은 고개 북쪽 능선의 DEM 격자값을 바탕으로 위치를 추정했다. 반면 4월 19일자 한 기록의 군사좌표(BR 571438)를 환산하면 고개 남서쪽 약 1km의 631m 봉우리(북위 약 13.956°, 동경 약 108.752°)가 된다. 이 기록의 원문은 열람하지 못했으므로 어느 쪽도 확정하지 않는다.
- 13개 중대의 소속(기갑연대만인지, 사단 다른 연대 포함인지)과 대대별 경과.
- 2중대와 2대대의 관계(배속 여부).
- 4월 11일 매복의 정확한 날짜와 규모. AP의 "2주 전"은 4월 12~13일 무렵을 가리킨다.
- 한국군·북베트남군 손실의 확정치. 국방부 『파월한국전쟁사』 10권 원문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 23~25일 흐린 날씨가 항공 지원에 미친 영향.
더 보기
▶KBS 뉴스 현장영상: 잊혀진 전투, 잊을 수 없는 슬픔, 안케패스 대혈전을 아시나요영상: 안케패스 대혈전을 다룬 KBS 현장영상(약 2분 40초) · KBS 뉴스, 2026
- 할 드레이크, 성조지 1972년 5월 6일 기사[6]. 전투 직후 고지를 걸어 본 기자의 기록으로, 봉우리와 안장부, 적 진지의 모습이 가장 구체적이다.
- Larsen·Collins,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 6장[9]. 한국군의 작전통제 관계와 전술 특성을 미군 시각에서 정리했다.
- 미 육군 FM 3-90 Tactics(2023) 2·3·5장과 부록 B[12].
- 훈련 시나리오 '안케패스 전투'에서 4월 11일부터 직접 지휘해 볼 수 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임동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국방부 『파월한국전쟁사』 10, 1985 인용).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425 (접속 2026-10-13)
- AP(사이공발), 한국군 손실·안케 고개 개통 보도, Pacific Stars and Stripes, 1972-04-29, 재수록본. https://thebattleofkontum.com/stars/032.html (접속 2026-10-13)
- AP(사이공발), 안케 고개 확보 발표·빈딘성 정세 보도, Pacific Stars and Stripes, 1972-04-28, 재수록본. https://thebattleofkontum.com/stars/14.html (접속 2026-10-13)
- UPI(AP 인용), "N. Viets March Toward Showdown", Pacific Stars and Stripes, 1972-04-27, 재수록본. https://thebattleofkontum.com/stars/10.html (접속 2026-10-13)
- AP(서울발), 대통령·국방부 장관의 맹호부대 치하 보도, Pacific Stars and Stripes, 1972-04-28, 재수록본. https://www.thebattleofkontum.com/stars/023.html (접속 2026-10-13)
- Hal Drake, "Hold Your Position – Or Die in It", Pacific Stars and Stripes, 1972-05-06, 재수록본. https://thebattleofkontum.com/stars/103.html (접속 2026-10-13)
- Peter Arnett(AP), "Highlands Staggering Under NVA Assault", Pacific Stars and Stripes, 1972-04-26, 재수록본. https://thebattleofkontum.com/stars/7.html (접속 2026-10-13)
- 미 국무부 역사국,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9–1976, Vol. XIX, Part 1, Korea, 문서 135: 백악관 특별행동그룹 회의록(1972-04-26).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69-76v19p1/d135 (접속 2026-10-13)
- Stanley R. Larsen·James L. Collins Jr.,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 6장 "The Republic of Korea", 미 육군 군사사센터(CMH), 1975(CMH 온라인판 사본). https://webdoc.sub.gwdg.de/ebook/p/2005/CMH_2/www.army.mil/cmh-pg/books/vietnam/allied/ch06.htm (접속 2026-10-13)
- 일간스포츠, 안케패스 대혈전 전승전우회와 전사자 추모식 보도, 2026-07-15. https://isplus.com/article/view/isp202607150046 (접속 2026-10-13)
- 사이공해방일보(SGGP), "Hàng trăm cựu binh hội ngộ ở quê hương khởi nghĩa Chàng Lía"(호아이안 해방 53주년), 2025-04-18. https://www.sggp.org.vn/hang-tram-cuu-binh-hoi-ngo-o-que-huong-khoi-nghia-chang-lia-post791314.html (접속 2026-10-13)
- 미 육군성, FM 3-90 Tactics, 2023-05-01(1장 1-123
1-124항, 2장 2-272-28항, 3장 3-203-21항, 5장 5-475-49항, 부록 B B-16·B-57항). https://armypubs.army.mil/epubs/DR_pubs/DR_a/ARN38160-FM_3-90-000-WEB-1.pdf (접속 2026-10-13)
- Open-Meteo, Historical Weather API(ERA5 재분석), 안케 고개 일대 격자, 1972-04-10~28 일별 기온·강수·구름량·일출·일몰. https://archive-api.open-meteo.com/v1/archive?latitude=13.96&longitude=108.76&start_date=1972-04-10&end_date=1972-04-28&daily=temperature_2m_max,temperature_2m_min,precipitation_sum,sunrise,sunset,cloud_cover_mean&timezone=Asia%2FBangkok (접속 2026-10-13)
- Open-Meteo, Elevation API(DEM), 안케 고개·주변 능선·안케 고원·해안 평지 표고. https://api.open-meteo.com/v1/elevation?latitude=13.9638,13.9735,13.955,13.91,13.975,13.985,13.995,13.980,13.990,13.970,13.950,13.945&longitude=108.7558,108.7804,108.655,108.91,108.745,108.75,108.755,108.765,108.770,108.735,108.765,108.75 (접속 2026-10-13)
- OpenStreetMap 자료(Photon 지오코더), "Đèo An Khê" 위치 검색. https://photon.komoot.io/api/?limit=5&q=%C4%90%C3%A8o%20An%20Kh%C3%AA (접속 2026-10-13)
- 미 육군 임무형지휘센터·제병협동교리국, "Combined Arms Center launches new mission command doctrine"(ADP 6-0 개정 발표), army.mil, 2019-08-23. https://www.army.mil/article/225414/ (접속 2026-10-13)
- KBS 뉴스, [현장영상] "잊혀진 전투, 잊을 수 없는 슬픔"…'안케패스 대혈전'을 아시나요?(YouTube), 2026-04-25. https://www.youtube.com/watch?v=nVpXTeVgyBE (접속 2026-10-13)
- Wikimedia Commons, File:Đèo An Khê, Gia Lai-Bình Định.JPG(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4%90%C3%A8o_An_Kh%C3%AA,_Gia_Lai-B%C3%ACnh_%C4%90%E1%BB%8Bnh.JPG (접속 2026-10-13)
- Wikimedia Commons, File:2nd Company, 1st Battalion, Cavalry Regiment, Tiger Division bivouac south of the An Khe Pass.jpg(퍼블릭 도메인, 미 육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2nd_Company,_1st_Battalion,_Cavalry_Regiment,_Tiger_Division_bivouac_south_of_the_An_Khe_Pass.jpg (접속 2026-10-13)
- Wikimedia Commons, File:Tiger Division Cavalry Regiment CO briefs US liaison, Operation Surprise, August 1969.jpg(퍼블릭 도메인, 미 육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iger_Division_Cavalry_Regiment_CO_briefs_US_liaison,_Operation_Surprise,_August_1969.jpg (접속 202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