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사례 분석
심층 분석 | 홍길동 작전 — 7개 대대는 왜 적 주력을 놓쳤나
· 1967-07-09 – 1967-08-26
개요
1편: 홍길동 작전 (1967년 7–8월)이 수렴 공격과 끊긴 흔적이라는 큰 줄기를 다뤘다면, 이 글은 그 안에서 내려진 결심을 하나씩 뜯어본다. 주월한국군은 수도사단 4개 대대와 9사단 3개 대대로 뚜이호아 서북쪽 산악 기지 '허브'를 조여 들어가 적 중대 몇 개를 가두었지만, 북베트남군 제95연대 주력은 끝내 붙잡지 못했다. 미 육군의 공식 연구는 이 작전을 한국군 전과의 대표 사례로 들면서도, 같은 장에서 한국군의 느린 반응과 헬기 운용 계획을 비판한다[1]. 아래에서는 기온·강수·월령 같은 수치로 지형과 날씨를 다시 읽고, 훈련 시나리오의 국면 p1p7(가정 국면 x1x3 포함)을 따라가며 "가둔 적"과 "놓친 적"이 어디서 갈렸는지 살핀다.
사진 1. 뚜이호아 육군 비행장(푸히엡, 1967년 7월 15일). 5~6월 미 제577공병대대가 활주로·유도로에 M8A1 강판을 깔았다. 작전 기간 헬기 재보급과 공중기동을 떠받친 해안 쪽 기반이다 — 사진: 미 육군 공병단 역사실(Office of History, USACE), 퍼블릭 도메인(미 연방정부 저작물), via Wikimedia Commons[11]
전략·작전 맥락
1967년 한국군은 베트남에 약 4만 8천 명을 보내 놓고 있었다[1]. 8년 6개월에 걸친 파병 전체로는 30만 명이 넘는다[15]. 9사단은 1966년 9월 부산을 떠나 닌호아에 자리 잡았고, 이 사단의 해설 자료는 홍길동 작전을 주요 작전으로 꼽는다[14]. 수도사단은 꾸이년 일대를 맡았고, 9사단은 28연대를 뚜이호아에 두어 1번 국도를 지키고 있었다[1]. 해안 평야의 인구 밀집 지역을 지키는 일이 기본 임무였다. 3~4월의 오작교 작전으로 두 사단의 전술책임지역이 1번 국도를 따라 이어졌고, 홍길동 작전은 그렇게 확보한 지역 뒤편 산악에서 적 정규군을 찾아 치는 후속 작전이었다[4].
상대는 북베트남군 제5사단 예하 제95연대였다. 이 연대는 1964년 약 2,000명, 3개 대대로 남하해 1965년 9월부터 푸옌성의 주력 정규군이 되었다. 1966년 미 제101공수사단 1여단과 여러 차례 부딪치며 연말에는 약 900명까지 줄었고, 1967년 상반기에는 연합군의 소탕과 B-52 폭격을 피해 산으로 물러나 있었다[2]. 지역의 베트콩 제85지방대대·제30주력대대와 협조했다[2]. 1966년 11월 미군의 제로니모 I 작전은 바로 이 '허브' 서쪽과 끼로 계곡에서 95연대 일부를 포위했지만, 연대를 푸옌에서 몰아내지는 못했다[3][5].
한국군 쪽에서 보면 이 작전은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이 직접 지휘한 군단급 작전이었다[4]. 상급 의도는 둘로 읽힌다. 하나는 적 정규군을 산속에서 먼저 쳐서 해안 공격 능력을 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안 평야 경계를 비우지 않는 것이다. 병력의 일부만 산으로 보낸 결정과 작전을 끝낸 시점은 이 두 의도 사이에서 정해졌다. 9월 3일 남베트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는 점도 배경이다. 95연대가 8월에 보충병을 받아 해안으로 돌아온 목적이 선거 방해였다는 미 육군 역사가의 서술이 있다[2].
지형·기상 정밀 분석(OAKOC)
작전 지역은 송바강 북쪽, 동째·꿍선·뚜이호아를 잇는 삼각형 안의 산악이다. 미 항공대대 보고서 요약은 공격 지역을 "뚜이호아–동째–동선 삼각지대 부근 산악"으로 적는다[17]. '허브'는 그 한가운데의 높은 산괴이고, 서북쪽으로 끼로 강을 따라 끼로 계곡이 푸옌–푸본 성 경계까지 이어진다. 한 연구자는 끼로 계곡을 대장간과 병원·진료소까지 갖춘 적의 큰 기지 지역이자 집결지로 묘사한다[3].
그림 1. 홍길동 작전 상세도(개략·추정). 지형은 훈련 시나리오 지도, 축선·날짜는 출처 1, 2와 1편, 대대 위치는 추정이다 — 자체 제작
- 관측과 사계: 산비탈과 계곡이 정글로 덮여 있어 공중 관측이 거의 통하지 않았다. 사계는 수십 미터 안쪽에서 끊기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적을 찾는 일은 보병의 수색에 달려 있었다. 미 육군 교범이 수색·공격을 쓰라고 하는 바로 그 조건, 곧 "적이 작게 흩어져 있고 물리적 수색 외에는 표적을 잡을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8].
- 접근로: 대대가 쓸 수 있는 길은 능선과 계곡 바닥뿐이었다. 북쪽 동째에서 남동쪽으로, 남쪽 꿍선에서 북동쪽으로 각각 하나씩 굵은 접근로가 '허브'에 닿는다. 적에게도 같은 계곡이 탈출로였다. 서쪽 끼로 계곡과 남쪽 송바강 방향, 동쪽 해안 쪽 산지로 빠지는 길이 모두 열려 있었다.
- 핵심 지형: '허브' 산괴 자체와, 그 동쪽 해안 평야를 내려다보는 능선이다. 동쪽 능선을 쥐면 적은 해안으로 나오는 길을 잃는다. 시나리오가 동쪽 능선의 적 후위를 7월 하순의 고비로 설정한 이유도 여기 있다.
- 장애물: 가파른 경사와 밀림, 계곡의 개울이 이동 속도를 묶었다. 하루 1~2km라는 진격 속도는 신중함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지형이 허락한 상한에 가까웠다. 헬기 착륙지는 좁고 드물었다.
- 은폐와 엄폐: 적은 소규모 기지와 동굴을 근거지로 삼았다. 동굴 입구가 몇 개인지 모르는 채 포위해야 했다는 점이 p2 결심의 핵심 난점이다.
기상과 빛. 작전 기간의 일일 관측 기록은 찾지 못했다. 대신 ERA5 재분석 자료로 허브 부근 격자(북위 13.25°, 동경 109.05°)를 보면, 7월 9일부터 8월 26일까지 49일간 낮 최고기온은 29.6~34.5°C(평균 32.4°C), 밤 최저기온은 평균 25.2°C였다[9]. 이 기간 강수량은 모두 약 128mm로, 1mm를 넘긴 날이 22일이었지만 하루 15mm를 넘긴 날은 8월 24일(25mm) 하루뿐이었다[9]. 중부 해안의 큰비는 9월 이후에 오므로, 이 작전은 덥고 비교적 건조한 시기에 치러졌다. 정글 속 행군에서 물이 탄약만큼 중요한 보급품이 된 이유다. 다만 재분석 격자는 산악의 국지 기상을 잘 담지 못하므로 경향으로만 읽어야 한다.
해는 7월 9일 05:22에 떠서 18:14에 졌고, 8월 26일에는 05:32에 떠서 17:59에 졌다(UTC+7 기준, 당시 남베트남 표준시와는 1시간 차이가 날 수 있다)[9]. 보름달은 7월 21일과 8월 20일, 그믐은 8월 6일이었다[10]. 1단계에서 접촉이 끊긴 8월 초가 달 없는 밤과 겹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포위망 사이를 빠져나가기에 가장 좋은 밤이었다. 다만 적이 실제로 언제 빠져나갔는지는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다.
편성과 지휘 관계
사료가 대대 번호까지 밝히지 않아, 표의 연대·대대 배정은 주둔지와 다른 기록을 바탕으로 한 추정이다.
| 구분 |
부대 |
규모·역할 |
근거 |
| 지휘 |
주월한국군사령부(사령관 채명신 중장) |
군단급 작전 직접 지휘 |
[4] |
| 북쪽 공격 |
수도사단(맹호) |
4개 대대. 동째 남쪽에서 남동쪽으로 공격. 연대 배정은 미확인(26연대 일부 참가 추정) |
[1편][2], 추정 |
| 남쪽 공격 |
9사단(백마) |
3개 대대. 꿍선에서 북동쪽으로 공격. 뚜이호아 주둔 28연대 중심 추정 |
[1편][1], 추정 |
| 동쪽 차단 |
월남군 22사단 47연대 |
2개 대대. 해안 평야 가장자리 차단 |
[1편][2] |
| 화력 |
미 공군 B-52, 한국군 사단 포병 |
7월 9일 공격 전 폭격, 이후 의심 지점 화력 |
[1][1편] |
| 항공 |
미 제10전투항공대대 |
7월 9일 07:00~8월 31일 24:00 직접지원. 제129강습헬기중대, 제180강습지원헬기중대(CH-47), 제403수송분견대가 지원했다는 증언 |
[17][6] |
| 적 지휘 |
북베트남군 5사단 사령부·후방 시설 |
끼로 계곡에 있다고 판단 |
[1편] |
| 적 주력 |
95연대(제4·5·6대대) |
1966년 말 약 900명, 1967년 보충. 서부 산악의 적 전체는 약 1,800명으로 판단 |
[2][17] |
| 적 협조 |
85지방대대, 30주력대대 |
95연대와 협조한 베트콩 부대 |
[2] |
| 적 남부 |
188연대 |
푸옌–카인호아 성 경계에 있다고 판단 |
[1편] |
이 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공격 7개 대대에 차단 2개 대대를 더해도 '허브' 둘레를 빈틈없이 감쌀 병력은 아니었다. 한국군의 장기는 대대·중대가 촘촘히 늘어서는 차단·수색이었다. 1969년 미 야전군사령관은 한국군 포위선에서 "사람 사이 간격이 10m도 안 된다"고 적었다[1]. 그런 밀도는 마을이나 작은 고지 하나를 둘러쌀 때 가능한 것이고, 수십 km 둘레의 산괴에서는 어렵다. 둘째, 적 판단 수치(약 1,800명)와 실제 접촉한 적(중대 몇 개)의 차이가 크다. 나머지가 어디 있었는지가 이 작전의 핵심 질문이다.
시간대별 경과
7월 9일 — 폭격과 출발
B-52 폭격으로 작전이 시작됐다. 미 항공대대 보고서 요약은 9일 아침 "여러 연대 규모의 공격"이 산악으로 들어갔다고 적는다[17]. 수도사단 4개 대대는 동째 남쪽 출발선에서, 9사단 3개 대대는 꿍선에서 출발했다. 첫 접촉은 미미했다[1편].
7월 10일~중순 — 느린 포위
두 사단은 하루 1~2km 이하로 능선과 계곡을 차례로 훑었다[1편]. 당시 기록 영상은 헬기 공중기동, 정글 속 소부대 수색, 부상자 후송 장면을 보여 준다[13][6]. 포위망 안에서 중대 규모의 적이 기지와 동굴로 들어갔고, 한국군은 출구를 막고 이를 제압했다. 미 육군 연구는 7월 9일부터 31일까지 적 손실을 408명으로 기록한다[1]. 이 수치는 한국군 보고를 옮긴 것이다.
7월 하순 — 허브 관통
사령부는 7개 대대 모두 '허브'를 지나 동쪽으로 소탕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는 저항이 강했지만 곧 거의 사라졌다[1편]. 이 시점의 보름달(7월 21일)은 야간 이동과 매복 양쪽에 빛을 주었다[10].
8월 초 — 접촉 단절
동쪽 능선의 저항이 끝난 뒤 약 2주간 접촉이 거의 없었다. 1단계는 진격 중 우회한 적 거점을 정리하며 마무리됐다. 정리 완료 날짜는 사료에 없다[1편]. 그믐(8월 6일) 무렵이다[10]. 8월 9일에는 뚜이호아 공군기지 옆 히에우쑤엉 군청이 기습당했다고 미 공간사 요약이 적지만, 서술 순서와 맞지 않아 날짜가 불확실하다[1편].
8월 12일~25일 — 2단계 수색
수도사단은 끼로 계곡을 따라 서북쪽으로 올라가 25일 오전 푸옌–푸본 성 경계에 닿았지만 적 사단 사령부를 찾지 못했다. 9사단도 남쪽 성 경계에서 188연대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1편]. ERA5 자료로는 이 기간 끝 무렵인 8월 24~25일에 작전 기간 중 가장 많은 비(이틀 약 36mm)가 내렸다[9].
8월 26일~31일 — 종결
부대는 해안 기지로 돌아갔다. 종료일은 자료마다 다르다(사료 비판 참고). 미 항공대대의 직접지원은 8월 31일 24:00에 끝났다[17]. 작전이 끝난 직후 95연대는 보충병을 받아 뚜이호아 일대 해안으로 돌아왔고, 수도사단 26연대와의 충돌에서 수백 명의 손실을 입었다[2]. 해안 마을에서 벌어진 이 싸움은 주민 피해가 컸던 별개 국면으로, 이 글과 시나리오는 다루지 않는다.
그림 2. 국면별 기동(18초 반복, 동작 줄이기 설정에서는 최종 상황만 표시). 개략·추정 — 자체 제작. 출처 1, 2와 1편 바탕
결심 포인트 심층
시나리오의 일곱 국면은 공격 부대 지휘부(수도사단 쪽 4개 대대를 지휘하는 위치)를 기준으로 짜였다. 각 국면의 '실제 결심'은 사료가 밝힌 결과에서 거꾸로 읽은 것이고, 지휘관의 당시 판단 근거를 직접 적은 1차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림 3. 결심 흐름과 작전 기간 강수·월령. 국면은 훈련 시나리오, 강수는 ERA5 재분석[9], 월령은 NASA[10] — 자체 제작
p1 진격 속도 (7월 9일)
- 그때 알던 것: 폭격은 끝났지만 무엇을 맞혔는지 모른다. 적 연대의 위치도 모른다. 첫 접촉은 가볍다. 공중 관측은 통하지 않는다.
- 선택지: (가) 하루 1~2km씩 능선·계곡을 차례로 수색, (나) 헬기로 1개 대대를 '허브' 한가운데 투입, (다) 정찰로 폭격 효과를 확인할 때까지 대기, (라) 능선을 따라 빠르게 전진해 포위망을 일찍 닫기.
- 실제 결심과 결과: (가). 한국군의 일반적 방식이기도 했다. 한 미군 지휘관은 한국군의 포위가 "매우 느리고 신중해서 돌 하나, 땅 한 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고 평했다[1]. 그 결과 포위망 안의 적 중대들은 빠짐없이 걸렸다. 그러나 느린 템포는 포위망이 닫히기 전 적 주력에게 시간을 주었다.
- 다른 선택이었다면: (라)는 포위망을 일찍 닫지만, 같은 교범이 경고하듯 진격 속도가 다른 부대 사이에 틈이 생긴다[8]. (나)는 적 본부가 실제로 '허브' 중심에 있었다면 결정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적 위치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1개 대대를 고립시키는 위험이 크고, 미군 평가자들은 당시 한국군의 헬기 운용 계획이 부실했다고 지적했다[1]. 가정 국면 x1(포위망의 틈)은 느린 전진의 대가가 어디서 드러나는지 묻는다. 실제 대응으로 설정된 '예비 중대로 틈을 막고 계곡 출구에 포병 사격 계획'은 FM 3-90이 말하는 간격 봉쇄와 같다[8].
p2 동굴 속의 적 (7월 중순)
- 그때 알던 것: 중대 규모의 적이 동굴과 엄체호에 있다. 입구 수는 모른다. 다른 대대는 앞쪽 계곡을 수색해야 하고 9사단과 수렴 시간표가 있다.
- 선택지: (가) 가둔 뒤 제압·소탕, (나) 우회하고 후속 부대에 맡김, (다) 즉시 돌격, (라) 항공 폭격만 요청하고 이동.
- 실제 결심과 결과: (가)에 가깝다. 사료는 적 중대 몇 개를 '가두었다'고 적는다[1편]. 출구를 막고 화력으로 누른 뒤 들어가는 방식은 아군 손실을 줄인다. 대신 시간이 들었다. 일부 거점은 우회했다가 1단계 끝에 정리했으니 (나)도 섞였다.
- 다른 선택이었다면: (라)의 '화력만으로 축소'는 FM 3-90이 가장 덜 바람직한 방법으로 꼽는다. 아군 피해는 줄지만 탄약과 시간이 많이 들고 적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할 수 있다[8]. 동굴처럼 엄폐가 강한 표적에서는 특히 그렇다. (다)는 입구를 모르는 상태에서 손실이 커질 위험이 있다.
p3 허브를 관통하라 (7월 하순)
- 그때 알던 것: 포위망 안 기지는 대부분 정리됐지만 놓친 적이 있을 수 있다. 동쪽 능선에 적 후위가 진지를 파고 버틴다. 9사단은 남쪽에서 나란히 전진해야 하고 동쪽 끝은 월남군이 막고 있다.
- 선택지: (가) 7개 대대 모두 동쪽 소탕, (나) 9사단은 차단선에 묶고 수도사단만 전진, (다) 1개 대대로 정면을 붙잡고 2개 대대로 북쪽 능선을 돌아 적 후위의 뒤를 침, (라) 멈추고 화력을 쏟은 뒤 전진.
- 실제 결심과 결과: (가). 저항은 곧 사라졌다[1편]. 강한 후위가 짧게 버티다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 뒤의 주력이 이미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신호였을 수 있다.
- 다른 선택이었다면: (다)의 우회는 후위의 퇴로를 끊을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산악 정글에서 2개 대대의 우회 기동은 시간이 걸리고, 9사단·월남군과의 협조선이 엇갈리면 아군끼리 위험해진다. FM 3-90은 두 수렴 부대 사이에 사격통제선을 두라고 한다[8]. (나)는 9사단을 차단 부대로 써서 남쪽 탈출로를 막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p4 텅 빈 산 (8월 초)
- 그때 알던 것: 거의 2주째 접촉이 없다. 버려진 기지와 오래된 흔적만 나온다. 장병은 한 달 가까이 헬기 재보급에 기대 지쳤다. 뒤에는 우회한 거점이 남았다. 95연대 주력의 행방은 모른다.
- 선택지: (가) 우회한 거점을 차례로 정리하고 1단계 마무리, (나) 거점을 무시하고 해안 평야 가장자리까지 동쪽 전진, (다) 소부대 수색대를 넓게 풀어 적 주력 재탐색, (라) 대대를 돌아가며 휴식·정비.
- 실제 결심과 결과: (가)[1편]. 뒤에 남은 적을 정리하는 것은 FM 3-90의 원칙에도 맞는다. 우회한 부대는 다른 부대에 넘길 때까지 적과의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8]. 하지만 이 결심은 '접촉을 다시 얻는' 일보다 '이미 아는 적을 정리하는' 일을 앞세웠다.
- 다른 선택이었다면: (다)가 이 국면의 핵심 대안이다. 교범은 불확실성이 클수록 정찰 부대를 크게 하라고 한다[8]. 2주간의 공백은 적이 재편성할 시간이었고, 95연대가 실제로 해안 가까운 산지에서 다시 나타난 것을 보면 넓은 정찰망이 그 이동을 잡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것은 결과를 아는 자의 판단이다.
p5 끊긴 흔적 (8월 12일)
- 그때 알던 것: 2주 넘게 접촉이 거의 없다. 해안에서 군청 기습 보고가 들어왔다. 사령부는 적 5사단 사령부가 끼로 계곡에, 188연대가 남쪽 성 경계에 있다고 판단한다.
- 선택지: (가) 4개 대대를 끼로 계곡으로, (나) 주력은 '허브'에 두고 소부대로 뚜이호아 서쪽 산지 탐색, (다) 2개 대대를 해안 평야 가장자리로 내려 접근로 차단, (라) '허브'에 머물며 의심 지점에 화력 집중.
- 실제 결심과 결과: (가)와 남쪽 성 경계 수색. 두 방향 모두 빈손이었다[1편]. 끼로 계곡은 1966년 미군이 적 기지를 찾았던 곳이고[3], 적 지휘·지원 시설을 치면 연대의 재기를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은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정보의 나이였다. 해안 쪽 기습 보고는 적 일부가 이미 해안 가까이 있다는 신호였는데, 수색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 다른 선택이었다면: (다)는 상급 의도인 해안 경계와 직접 맞닿는다. 9월 3일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고, 95연대가 실제로 8월에 해안을 노리고 돌아왔다는 서술을 보면[2] 가장 '수비적인' 이 선택이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적을 만났을 수도 있다. 가정 국면 x2(서쪽 산기슭)는 바로 이 엇갈림을 다룬다.
p6 끼로 계곡 (8월 중순)
- 그때 알던 것: 며칠째 서북쪽으로 올라가도 적 사령부와 후방 시설이 나오지 않는다. 남쪽 9사단도 빈손이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착륙지가 좁아지고 재보급 간격이 길어진다.
- 선택지: (가) 같은 방식으로 성 경계까지, (나) 수색을 멈추고 '허브'로 돌아 95연대 재탐색, (다) 헬기로 중대를 앞 능선에 건너뛰듯 투입, (라) 멈춰 계곡 바닥을 철저 수색.
- 실제 결심과 결과: (가). 25일 오전 성 경계에 닿았다[1편]. 끝까지 간 덕분에 '그곳에 사령부가 없다'는 소극적 정보는 확실해졌다.
- 다른 선택이었다면: (다)는 FM 3-90의 수색·공격 기법과 맞는다. 결정 부대는 정찰 부대가 적을 찾으면 공중기동으로 근처 착륙지에 들어가야 하고, 적이 이탈하기 전에 닿을 만큼 빨라야 한다[8]. 다만 깊은 계곡의 좁은 착륙지와 한국군의 헬기 지원 요청 방식에 대한 미군의 불만을 감안하면[1], 실행 가능성은 낮았을 것이다. 가정 국면 x3(늘어난 보급선)은 이 한계를 다룬다.
p7 성 경계에서 (8월 25일)
- 그때 알던 것: 적 5사단 사령부도 95연대 주력도 확인되지 않았다. 7주 가까운 산악 작전으로 장병은 지쳤다. 해안 경계 병력은 오래 비운 기지를 걱정한다.
- 선택지: (가) 종결, 전 대대 복귀, (나) 2개 대대를 뚜이호아 서쪽 산지에 남겨 차단·수색, (다) 돌아가는 길에 '허브' 재수색, (라) 대대는 복귀하되 소규모 장거리 수색조와 항공 관측을 남김.
- 실제 결심과 결과: (가). 며칠 뒤 95연대는 해안 쪽에 다시 나타났다[2].
- 다른 선택이었다면: (라)는 비용이 가장 적으면서 적의 재진입을 일찍 알아챌 수 있는 방안이었다. FM 3-90도 결정 부대를 쓸 조건이 맞지 않으면 정찰·고정 부대가 감시를 이어 가라고 한다[8]. 한 미군 장성이 한국군이 "작전 뒤 너무 오래 쉰다"고 비판한 대목과도 이어진다[1].
교리로 다시 읽기
수색·공격(FM 3-90 4장 4-50~4-63항). 교범은 흩어진 적을 상대로 정찰·고정·결정 부대를 나누라고 한다[8]. 홍길동 작전의 1단계는 7개 대대 전부가 정찰 겸 결정 부대로 움직인 형태에 가까웠다. 그래서 포위망 안에서 찾은 적은 확실히 제압했지만, 포위망 밖으로 빠진 적을 쫓을 별도의 기동 부대가 없었다. 4-62항은 결정 부대가 "적이 접촉을 끊기 전에" 닿을 만큼 빨라야 하고, 이를 위해 정보참모가 적의 이탈 소요 시간을 추정하라고 요구한다. 1단계의 느린 템포는 이 계산과 반대 방향이었다.
포위(FM 3-90 부록 C). C-10항은 포위가 많은 병력과 시간을 요구하고 대개 전진을 늦춘다고 적는다. C-15항은 진격 속도가 다른 부대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포위된 적은 그 간격을 찾아 빠져나가려 한다고 경고한다. C-17항은 기동력 있는 부대가 연속 진지 대신 핵심 지형만 점령하는 방식을 허용하되, 탈출 시도를 탐지할 수단을 갖추라고 한다[8]. 산괴 하나를 7+2개 대대로 둘러싼 이 작전은 연속 포위선을 만들 수 없었으므로 C-17의 방식이 현실적이었다. 그렇다면 계곡 출구마다 관측소와 매복, 포병 사전 계획이 탐지 수단이 되었어야 한다.
화력에 의한 축소(C-19~C-20항). 미 육군 연구는 한국군의 언덕 공격 하나에 B-52·포병·전차 지원을 갖추는 데 한 달이 걸렸다는 미군 장성의 말을 옮긴다[1]. 화력 위주 방식은 아군 손실을 줄였지만, 같은 교범이 말하듯 시간과 탄약을 많이 쓰고 결과 확인이 어렵다.
우회 기준과 접촉 유지(12-27항, 4장). 교범은 상급 부대가 어떤 규모의 적을 우회해도 되는지 기준을 정하고, 우회한 적은 다른 부대에 넘길 때까지 접촉을 유지하라고 한다[8]. p2와 p4의 결심은 이 원칙을 지켰다. 대신 '적 주력과의 접촉을 다시 얻는' 과업은 어느 부대에도 명확히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상대편의 원칙. 95연대의 행동은 1966년 제로니모 I 뒤와 같은 양상이었다. 한 연구자는 미군의 높은 전과 집계에도 적이 "몸을 숨겼다가" 미군이 떠난 뒤 돌아왔다고 정리한다[3]. 연합군의 대규모 소탕 때는 산으로 흩어져 결전을 피하고, 압력이 걷히면 해안 인구 지역으로 돌아오는 방식이다[2]. 홍길동 작전도 이 순환의 한 바퀴였다.
사료 비판
| 쟁점 |
사료 A |
사료 B |
판단 |
| 종료일 |
8월 26일(한국 측, 1편) |
8월 28일(미 육군 연구[1]) · 8월 31일(미 항공대대 지원 종료[17]) |
지상 작전 종료와 항공 지원 종료는 다른 사건이다. 26일과 28일 차이는 복귀 완료 시점 기준 차이로 보인다. 한국 측 원문 미확인 |
| 적 손실 주장 |
7월 25일까지 500명 이상(한국 발표, 1편 경유) |
7월 9~31일 408명(미 육군 연구[1]) |
기간이 늦은 B가 더 작다. A는 발표 시점의 잠정 보고일 가능성이 크다 |
| 최종 적 손실 주장 |
700명 이상, 화기 450정 이상(채명신 회고, 1편 경유) |
638명, 개인화기 359정·공용화기 98정(미 육군 연구[1]) |
B의 화기 합계는 457정으로 A의 '450정 이상'과 맞는다. 인원은 B가 집계 기준이 분명하다. 둘 다 한국군 보고에 기반한 주장이며 독립 검증되지 않았다 |
| 적 병력 |
서부 산악 약 1,800명(미 항공대대 보고서 요약[17]) |
95연대 1966년 말 약 900명(미 육군 역사가[2]) |
A는 여러 부대를 합친 정보 판단, B는 연대 하나의 추정이라 모순은 아니다 |
| 한국군 평가 |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의 높은 사기·전문성 평가[1] |
느린 반응, 헬기 요청 계획 부실, 작전 후 장기 휴식 비판[1] |
같은 책의 같은 장에 함께 실렸다. 칭찬은 결과(교환 비율), 비판은 과정(템포·기동)을 본 것이다 |
미 육군 연구가 옮긴 비율 수치(15 대 1, 24 대 1)는 당시 연합군이 성과를 재는 방식이었다. 1966년 제로니모 I을 분석한 연구자는 이런 수치가 지속적인 성과를 보여 주지 못했다고 지적한다[3]. 이 글은 이 수치를 성과로 쓰지 않고 사료 간 차이를 보이는 데만 쓴다.
미 육군 공간사(MacGarrigle, 1998)는 1편의 핵심 출처지만 이번에도 PDF 접근이 막혀(403) 직접 대조하지 못했다[16]. 미 제10전투항공대대 전투 후 보고서도 같은 이유로 검색 요약만 확인했다[17]. 이 두 문서를 원문으로 읽으면 대대 번호와 날짜 상당 부분이 풀릴 것이다.
사진 2. 뚜이호아 공군기지(1967년 11월 28일). 제577공병대대가 정비 주기장에 M8A1 강판을 막 깔았다. 히에우쑤엉 군청은 이 기지 옆에 있었다 — 사진: 작자 미상(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11-CCV-34-CC80857), 퍼블릭 도메인(미 연방정부 저작물), via Wikimedia Commons[12]
교훈
- 포위망을 짤 때 탈출로 감시를 같이 짠다. 병력이 산 전체를 둘러쌀 수 없다면 계곡 출구마다 관측과 사전 계획 화력을 둔다. 간격은 진격 속도가 다른 부대 사이에서 생긴다(FM 3-90 C-15).
- 아는 적을 정리하는 일과 놓친 적을 다시 찾는 일을 나눠 맡긴다. 우회 거점 정리는 후속 부대에, 접촉 재획득은 별도 정찰 부대에 준다.
- 정보의 나이를 따진다. 사령부 판단과 최신 보고(해안 기습)가 엇갈리면 최신 보고가 가리키는 쪽을 먼저 확인한다.
- 상급 의도로 돌아간다. 적을 못 찾을 때 지켜야 할 곳이 어디인지 다시 묻는다. 이 작전에서는 해안 평야였다.
- 종결도 계획한다. 대대를 빼더라도 소규모 감시를 남기면 적의 재진입을 일찍 안다.
- 보급이 수색 범위를 정한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착륙지와 재보급이 작전 속도를 좌우한다. 착륙지 확보를 기동 계획에 넣는다.
미확인 쟁점
- 참가 대대의 번호와 소속 연대. 9사단 30연대 장병이 8월 초 동굴 수색 중 숨졌다는 추모 기록이 검색에는 나오지만, 원문 사이트가 봇 차단으로 열리지 않아 확인하지 못했다.
- 95연대 주력이 포위망을 빠져나간 시점과 경로.
- 히에우쑤엉 군청 기습 날짜(8월 9일 표기)의 정확성.
- 1단계 우회 거점 정리 완료일과 2단계 9사단 수색로.
- 한국 측 전투상보(맹호·백마 부대) 원문. 한 연구가 참고문헌으로 인용하지만[4] 공개본을 찾지 못했다.
더 보기
▶ROK Operation Hong Kil Dong 1967영상: 1967년 홍길동 작전 현장 기록 필름(약 14분). 미 육군 종군 촬영병이 찍은 필름에 이 작전을 지원한 미 헬기 부대원들의 증언을 붙였다 · 221st Signal Company(미 육군 사진중대 참전자회), 2021[6]
▶대한뉴스 제654호 월남 소식영상: 대한뉴스 제654호 월남 소식(1967년 12월 22일 제작, 약 2분). 같은 해 하반기 맹호부대의 작전과 마을 복구 장면 · KTV 아카이브(한국정책방송원), 2016[7]
영상 자료: 베트남의 맹호부대 작전(1967년 추정, 약 3분). 시기·장소는 장비로 추정한 것이다 — 전쟁기념관 오픈아카이브, 공공누리 제1유형(KOGL Type 1), via Wikimedia Commons[13]
출처
- Stanley R. Larsen·James L. Collins, Jr., 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 Vietnam Studies, 미 육군성, 1975(CMH Pub 90-5), 6장 "The Republic of Korea"(괴팅겐대 도서관 CMH 미러). https://webdoc.sub.gwdg.de/ebook/p/2005/CMH_2/www.army.mil/cmh-pg/books/vietnam/allied/ch06.htm (접속 2026-10-14)
- Erik Villard, "The NVA's Plan for a Great Escape", Vietnam 2018년 2월호(HistoryNet 게재 2018-01-02). https://www.historynet.com/nvas-plan-great-escape/ (접속 2026-10-14)
- Robert J. Thompson, "Geronimo: Strategy Lessons from History's Periphery", The Strategy Bridge, 2016-12-04. https://thestrategybridge.org/the-bridge/2016/12/4/geronimo-strategy-lessons-from-historys-periphery (접속 2026-10-14)
- 허동욱, "베트남전쟁 오작교·홍길동작전의 포상과 교훈", 《한국보훈논총》 19권 2호, 한국보훈학회, 2020, 9–42쪽(KCI 초록).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2604120 (접속 2026-10-14)
- 미 제101공수사단 2여단 전우회, Weekly History 06–12 November(2016), 제2-502보병대대 전투 후 보고서(제로니모 I, 1966-12-10) 인용. https://2ndbde.org/weekly_history/2016/06_november-12_november_2016.pdf (접속 2026-10-14)
- 221st Signal Company(미 육군 사진중대 참전자회), "ROK Operation Hong Kil Dong 1967"(YouTube), 2021. https://www.youtube.com/watch?v=i6EnC92PfUE (접속 2026-10-14)
- KTV 아카이브(한국정책방송원), "대한뉴스 제 654호-월남 소식"(YouTube), 2016(원 제작 1967-12-22). https://www.youtube.com/watch?v=c62PwDi9YSg (접속 2026-10-14)
- 미 육군성, FM 3-90 Tactics, 2023-05-01(4장 4-50
4-63항, 12장 12-27항, 부록 C C-9C-20·C-26항). https://armypubs.army.mil/epubs/DR_pubs/DR_a/ARN38160-FM_3-90-000-WEB-1.pdf (접속 2026-10-14)
- Open-Meteo, Historical Weather API(ERA5 재분석), 북위 13.25°·동경 109.05° 격자, 1967-07-09~08-26 일별 기온·강수·일출·일몰. https://archive-api.open-meteo.com/v1/archive?latitude=13.25&longitude=109.05&start_date=1967-07-09&end_date=1967-08-26&daily=temperature_2m_max,temperature_2m_min,precipitation_sum,sunrise,sunset&timezone=Asia%2FBangkok (접속 2026-10-14)
- 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Phases of the Moon: 1901 to 2000(1967년 7~8월). https://eclipse.gsfc.nasa.gov/phase/phases1901.html (접속 2026-10-14)
- Wikimedia Commons, File:Phu Hiep, July 1967.png(미 육군 공병단 역사실,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hu_Hiep,_July_1967.png (접속 2026-10-14)
- Wikimedia Commons, File:Tuy Hoa air base in November 1967.jpg(NARA 111-CCV-34-CC80857,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uy_Hoa_air_base_in_November_1967.jpg (접속 2026-10-14)
- Wikimedia Commons, File:Operation of the Fierce Tiger Divis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rmed Forces in Vietnam, 1967.webm(전쟁기념관 오픈아카이브, KOGL 제1유형).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Operation_of_the_Fierce_Tiger_Division_of_the_Republic_of_Korea_Armed_Forces_in_Vietnam,_1967.webm (접속 2026-10-14)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파월 백마부대 작전현황 및 현지생활상"(사진 컬렉션 해설). https://archives.kdemo.or.kr/photo-archives/view/00755902 (접속 2026-10-14)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베트남전쟁 1954~1975".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502200&code=kc_age_50 (접속 2026-10-14)
- George L. MacGarrigle, Combat Operations: Taking the Offensive, October 1966 to October 1967, 미 육군 군사사센터, 1998, 311–314쪽. https://history.army.mil/portals/143/Images/Publications/catalog/91-4.pdf (접속 시도 2026-10-14, 403으로 본문 미확인. 1편의 대조 내용을 따름)
- 미 제10전투항공대대, Combat After Action Report, Operation Hong Kil Dong, 1967, DTIC AD0387534. https://apps.dtic.mil/sti/pdfs/AD0387534.pdf (접속 시도 2026-10-14, 403으로 검색 요약만 확인)